[스크랩] 정의란 무엇일까?(8-2)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기전실 입구에 ‘능소화’가 화사하게 피어서 낯 선
나를 보고 환히 웃어 주었다. 어느 새 햇빛에 바랜 초록의 잎사귀가 봉숭화 꽃처럼 붉게 물드나
싶더니 다 떨어지고 이제는 찬바람이 몸에 스민다. 나의 꿈도 가을 단풍처럼 붉게 물들더니 자꾸
퇴색해 간다.
삶이란 한 번 삐끗하면 참 회복이 힘들다. 어느새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저 만큼 떨어져
있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자꾸 멀어져 간다. 가끔은 내가 투명인간이나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말은 허공에 흩어지기 일쑤고 핸드폰은 먼 우주로부터 오는 교신처럼 희미하다.
그나마 모두 내 얄팎한 주머니를 노리는 전화가 내가 아직 이 땅에 소속되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하에 내가 숨 쉬고 꿈꿀 비무장지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곳에서
무장지대의 온갖 불의를 외계에 알리는 일을 나의 새로운 임무로 삼기로 했다.
‘Jhon, D. Sinclair’로부터 격려의 편지가 왔다.
“경애하는 ‘소외’씨!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이 세상에 전혀 쓸모없는, 우주의
쓰레기이자 페기물들로써 천국에 부적합한 사람들이고 지옥에도 간신히 들어 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살아 있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을 필요조차도 없는 사람들 이지요.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미 없고 항상 변화하는 깃대를 계속 쫒아 다닙니다. 결코 어떤 자리에 확실히
선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대변하지 않는 깃대를 말이지요.
‘소외’씨!
귀하의 임무에 격려를 보냅니다. 그대를 우주의 어디선가 늘 지켜 보겠습니다.
-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싱클레어“
새로운 힘이 솟는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은 삶의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다. 싱클레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오래 사귄 친구로 생각되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불의에 대해
이제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무장지대의 현실은 심각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잘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나의 임무가 중요한 이유다.
왜 불의가 만연할까? 그것은 전가(轉嫁) 때문이다. 책임이나 손해를 힘이 약한 자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간접세를 통하여 서민에게 전가시키고, 경계소홀의 책임을 국민의 안보의식 해이로...
전가는 왜 일어나나? 그것은 ‘비자금’과 관련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돈 말이다.
밀림의 왕자인 사자는 생존을 위해 처절한 사냥을 하며 오히려 초식동물보다 생존률이 낮다.
왜 그럴까? 밀림에는 전가가 없다. 누구도 포식자를 돕지 않는다. 오로지 자연의 순리에 맡길 뿐이다.
정부가 힘 있는 자를 도우면 그 정부는 불의한 정부다.
우주에 보낼 편지의 제목을 정했다. - [정의, 전가 그리고 비자금에 관한 몇 가지 고찰]-_ ‘소외’ 부침
“너무 딱딱한 걸 용서하시게, 싱클레어씨! 그리고 한 번에 다 보낼 수가 없다네. 근무시간에 쓰는
것이기 때문이지... ”
꿈에 ‘노자(老子)’와 ‘루소’를 만났다.
“아! 선생이시여! 저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나는 하얀 수염 속의 얼굴을 우러르며 절했다.
“그대가 ‘소외’인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일쎄. 자연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주지,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하지. 하지만 사람들은 달라.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몸살이
나지,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할 줄을 모른다네.”
노자는 석양에 하얀 구름을 타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사라졌다.
사라진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얀 얼굴에 곱슬 곱슬한 머리를 가발처럼 쓴 ‘루소’가
나타났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의 깃발 앞에 서 있었는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젊은이, 만일 자연이 없었다면 그대는 벌써 쓰러 졌겠지? 자네가 ‘모락산’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던 것을 기억하네. 그리고 ‘백운호수’의 이른 아침에 피어나던 물안개도 기억하지, '백운산'의
뭉게구름과 ‘청계산’ 솔바람은 그대의 가슴을 확 틔어 주었지. 안 그런가?”
“아!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시던,,, ”
아침에 S반장이 출근했다. 그가 전기장판으로 기어 든다.
“무슨 글을 쓰세요? 가만 있자,,,,,,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이’? ‘정,,,,,,,,,,의,,,,이’?”
그는 지금 개그 콘써트의 코메디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간단해요. 정일이 형님이 한방 탁 터트려 주면 돼요.”
“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리고 쏘게 가만 있나? 미국이.”
“위성사진으로 다 보고 있다고요? 우리는 뻥커에 있는데요. 하여튼 정의는 힘들어요. 아님 전두환
아저씨처럼 다 삼청교육대 보내던가. 보세요. 요즘 장가 못가는 사람 천지여요.”
“가면 될 거 아녀? 봉급 받아서 다 어디다 써?”
“봐요. 똑 같쟎아요. 누가 우리 사정 아냐고요. 150만원 받아서 기름 값, 공과금, 집세 내고 나면 뭐
있어요. 여자 생각도 안 나요. 초식남이 다 된거예요. 애...는 누가 키울꺼야, 애,,는?” 그가 코메디언처럼
말하며 핏대를 올린다.
나는 서둘러 편지를 외계로 발송하고 무장지대로 퇴근했다.
<발송문>
[ 정의, 전가 그리고 비자금에 대한 몇 가지 고찰 ]
1. 서론
‘정의(正義)’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질문을
받으면 혼란스러워 진다. 그러면서도 정의가 훼손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분개한다. 왜 그렇까? 사람들은
‘양심’, ‘도덕’, ‘진리’,그리고 ‘법’ 등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에 대한 ‘잣대’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잣대를 통해서
여러 현상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그 ‘잣대를 어떻게 정의(定義)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새롭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정의는 ‘공공성(公共性)을 그 전면에 갖고 있다. 공공성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안에 대하여 특정 소수의
전유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접근이나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개방을 의미한다. 공공성은 열린사회의
기초이며, 정의의 최소 공배수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전가(轉嫁)’라는 최대 공약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방지하고 해소시키는 일’이
정의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현 상황은 정의롭지 못하며, 이는 전가에서 비롯되고
특히 그 이면에 도사리는 ‘비자금(秘資金)’은 전가의 선두에 서있다고 본다.
가.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덜’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계속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고, 또 읽다 보면 지루하기도 한 이 책이 왜 이러한 인기를 누리는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정의롭지 못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책에 의하면 정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선택의 자유’, ‘공동선’ 등 이라고 여러 일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하고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이론은 때론 조화를 이루고, 때로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또 새로운 문제를 낳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의를 바라보는 ‘시각차’ 때문이다. 정의(定義)를 내리는 그들의 시각은 ‘치자’나 ‘위너’의
입장에 서 있다. ‘잉카문명’을 멸망시킨 ‘에스파냐(스페인)’의 입장에서 내리는 정의가 멸망당한 ‘잉카의
후예들’에게도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불의’를 알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인종청소’, ‘십자군 전쟁’, 등등
사실 ‘정의’에 대하여 이것이라고 딱 집어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그 이면에
힘(권력, 국력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중국정부는 공식적인 논평에서 ‘6.25전쟁은 정의를 위한 전쟁이었다.’라고 발표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경악할 노릇이지만 ‘정의’에 대해서 되집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가치가 정의의 대열에 같이 오를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세계인 아프리카의 밀림을 생각해 보자. 밀림의 왕자인 사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며 사냥에 실패하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또한 사자를 비롯 표범 등 포식자의 생존률 역시
다른 동물에 비해 낮다. 반면, 초식동물들은 사자에 비해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으며 오히려 늘어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누구도 포식자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전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강자든 약자든 모두 자연의 질서 속에서 순응하고 살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장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평범하면서도 진리이다.
정의는 ‘진리’나 ‘진실’과 무관한가? 어떤 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므로써 ‘정의도 죽었다.’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주의 뜻이다.’라고 하며, 한 교파내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다툰다. ‘어떻게 그들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같단 말이냐?’라고 소리치며.....
나는 정의란 ‘전가의 방지 및 해소’라고 정의(定義)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는 소통이 부재하고,
양극화가 심화되었으며, 정의가 훼손되었다고 말한다. 이럴 때 그 이면에는 전가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내포되어 있다. 전가는 ‘희생이나 고통의 부담’을 의미하며 언제나 힘이 약한 쪽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정의는 이러한 전가의 희생자와 고통의 분담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전가는 책임의 전가, 비용의 전가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대개는 ‘특정 소수’로부터 출발하여 ‘불특정 다수’에게로 귀착된다.
나는 전가를 예방하고 그것이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며
정의라고 생각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