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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의란 무엇일까?<8-8>

쥬띠 2011. 1. 22. 16:21

 

   쥐새끼가 잡혔다. S반장은 지난번 그러니까 3일 전에 교대할 때

   “날이 추우니까 자꾸 공동구(共同溝) 같은데서 쥐가 기어들어오나 봐요. 내가 내일

치울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퇴근했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출근해서

기계실에 들어서는 순간 쥐의 비명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제법 커다란 쥐 한마리가

한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끈끈이는 그럴수록 그의 몸을 옥죄는

것이었고 나는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 쥐의 한쪽 눈을 급히 외면하고 피했다. 만지기가

싫어서 저녁이면 죽겠거니 생각하고 그대로 두었다. 쥐는 내가 기계실에 드나들 때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오늘 아침에 핸드폰의 알람소리에 깨어 기계실에 가보니 쥐는 죽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쥐는 두 마리였다. 새끼 한 마리가 큰 쥐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는데 꼬리가

두 개인 것을 보고서야 안 것이다.

   “S반장이 게을러 터져서 어제 안 치우고 퇴근했군, 나도 모른 체 하고 그냥 퇴근해 버려?”

쥐를 어떻게 처리하나 잠시 고민했다.

   "둘둘 말아서 비닐에 넣은 후 쓰레기봉투에 처넣어야지, 어차피 겨울이니까 구데기는

안 생길꺼고..." 날씨가 추워서 겨우 생각해 낸 계획이었다.

   “아니, 그런데 왜 잡혔을까? 끈끈이에 잡혀 죽어 있는 새끼를 보지 않았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 졌다. 자세히 보니 어미의 손이 새끼의 머리를 안고

있었다.

   “죽은 새끼를 구하려 했을까? 아! 얼마나 허망하고 무모한 일인가?”

 

 

   가마니 거지가 있었다. 봉두난발에 수염이 장비처럼 생긴 그는,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허리에 깡통을 찼으며 어깨에 헤어지고 더러워진 가마니를 둘러메고 다녔다. 가마니

윗부분에는 새끼가 메어 있어서 거기에 목을 걸고 다녔다.

   그는 이따금 한 쪽 귀를 손으로 덮고 다른 한 손을 허공을 향해 치켜든 채, 마치 도매시장의

경매사처럼 하늘을 향해 계속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그를 따라 다니며

놀려 대기도하고 어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울거나 도망을 갔으며 아주 용감한 아이는

그를 간첩으로 경찰서에 신고해서 공책을 상으로 타기도 했다. 그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져서인지 나중에는 신고해도 더 이상 공책을 주지 않았으며, 어른들은 그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쳤다고 했다.

   봄이면 산허리 양지바른 조그만 동굴 앞에서 그가 가마니를 깔고 이를 잡는 모습을 보았고,

어떤 아이는 멀리서 돌멩이를 던지고는 그가 쳐다보면 도망가기도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혼내며 ‘그러면 못 쓴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 길에서 혼자 허공을 향해 소리치거나 중얼대는 미친 사람을

때마다 가마니 거지가 떠올랐으며, 그 거지보다 훨씬 나이가 들고 보니 그가 ‘다마스커스’의

노상에 서있던 ‘사울’을 닮았다고 뜬금없이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가 혹시

‘우주와 교신했던 것이 아닐까?’란 의심이 오늘 쥐의 주검을 보고서 불쑥 들었다.

 

 

   어쩌면 비무장지대란 한시적인 것일지 모른다. 휴전선으로 둘러싸인 ‘DMZ’도 통일이

되거나 어떤 이유로 철책선이 개방된다면 ‘DMZ’의 운명은 한 순간에 바뀔 것이다.

무장지대 사람들은 친환경 개발을 내세우고 자연생태학습장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내고

관광호텔을 짓고 ‘DMZ’ 일주 관광버스를 운행할 것이 자명(自明)하다. 갑자기 소름이

솟으면서 ‘과연 이곳은 안전할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주와의 교신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문학이라는 세계의 입구에 서 있다. 멀리 광장에는 분수가 시원하게 뿜어 나오고

그 너머로 초원과 아름다운 건물도 보였다. 한 쪽에는 새롭게 디지털로 단장한 환타지(Fantasy)

동산도 보였다. 나는 반대편에 굽어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석양은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산들바람은 부드러웠다. 오솔길은 숲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숲의 초입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그 숲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윤동주는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공초선생은 흐름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이라며 시대를 아파했다. 어디 그 뿐이랴? 휼륭한 예술가가 과거의 그릇된 행적 때문에

폄하되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아픔이기도 하다.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한 ‘미당’선생을

그려봤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더니 별들이 하나 둘 어두운 하늘에 피어올랐다. 나는 숲의 커다란

어둠이 두려워 졌으며 늑대나 하이애나를 쫒을 막대기 하나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하늘에 유성 하나가 길게 흐른다. 나는 그 유성을 타고 누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마도 ‘T.S. Eliot’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노래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바람에 스쳐

속삭임은 자꾸 끊겼다.

 

‘자 가세 너와 나,

..........

방에서는 여자들이 미켈란젤로에 대해 얘기하고,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

내 감히 우주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

그리고 해 볼 가치가 있을까?

.............

만일 한 여자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전혀 그런 뜻이,>라고 말한다면

.......

내 진의(眞意)는 말로 하기가 불가능하다.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기의 원고를 불태워 주기를 유언했을 때, 그것은

자기의 글이 잘못 되서가 아니라 박물관에 박제된 수많은 표본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무력감에서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살아서 하나의 울림으로 정의에 기여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문학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해야 한다. 불의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두려움은 공포를 불러오고 거기에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하나의 성채(城砦)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문학이 정의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디지털시대의 거센 도전이

아니라 자체의 정체성 상실에 의해 무너질 것이다. 박제된 문학을 보았는가?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한 ‘루즈벨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나는 <발송문>을 빨리 마무리해서 우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래가 끝나니 왠지

초조해진 것이다.

 

<발송문 7호>

 

나. 건설관련 제도의 개선

     전가의 문제의 두 번째 과제는 불합리한 건설관련 제도의 시급한 개선이며, 최우선 과제는

리베이트나 부정접대 금액의 회수제도이다. 물론 페널티에 해당하는 금액도 포함해서 말이다.

여기서는 ‘불합리한’의 의미를 ‘불특정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닌’으로 한정시킨다. 이를 위해

‘내부자 신고 포상제’도 병행해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불합리한 제도의 시급한 개선 문제는 정부도 언제나 노력하고 추진해 왔다.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基位 不謀基政)’이란 말처럼 관료제 내부의 문제는 차치(且置)하자. 관료제는

칙칙한 면이 있다. 일부는 제도를 개선하고 단순화 시키고 작게 만들지만, 일부는 미로를

만들고 방화벽을 구축한다. 그 내부의 관료들은 커다란 조직의 부속이 되어, 오늘도 수많은

규정의 하나를 틀어쥐고 감독권을 행사하고 지위를 유지한다.

 

     한 때 교통경찰들이 거리를 메운 적이 있었다. 가슴속에 스티커를 잔뜩 품고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철주야로 열심히 일했다. 심지어 고속도로에서도 속도계를 휘두르며 죽음을

무릅쓰고 단속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들이 대거 사라졌다. 한 달에 20~30만원씩

뜯기던(?) 영세 화물차, 영업차량 운전자들은 즉각적인 혜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통행정에도 커다란 개선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는 ‘화물차량의 속도 및 차선제한

해제’란 제도개선의 결과이다. 화물차의 성능은 개선되어 일반 승용차와 차이가 없는데도

계속 규정에 묶어두는 것이 현명했을까? 도로에서 화물차나 승합차량은 무조건 잡으면 단속

에 걸렸다. 시간에 쫒기는 그들은 맨 갓 차선을 엉금엉금 갈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속도제한

이나 차선위반에 꼭 걸리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영세민이었다.

 

     제도개선의 1차적 우선순위는 건설과 관련되어 있다. 건설투자가 GDP 대비 17%에 이르고

있으며, 건설은 비자금의 충직한 생산처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건설업체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는 끊임없이 그들의 일거리를 만들기에 고심하고 있다. 한 번 지으면

수백 년씩 가는 유럽의 건축물과는 달리, 아파트도 20년만 넘기면 새로 부수고 다시 짓자고

아우성치는 우리의 현실에서 건설업체가 많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또한 건설관련 비리는 워낙 규모가 크다. 특히 관급공사는 정상적인 경영논리, 경제논리,

기술논리가 통하지 않는 분야이다. 언론에 발표된 것을 보면 지난 5년간 총 공사비 200억 원

이상의 공사 입찰내역을 살피니 95% 이상이 담합과 로비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낙찰가가

족집게처럼 발주금액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그 논거였다. 건설업체를 제제하려하자 오히려

국토해양부로부터 선처를 희망하는 탄원서가 제출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설업체 경영진들은 건설업무보다는 골프나 룸싸롱 접대에 더 열심인 것이

현실이다. 공무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예산을 공짜로 줄 수는 없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경제적이고 튼튼한 성과물을 정당한 가격에 구매하는 행위다. 내 건물을

짓는다면 건설업자에게 뇌물을 주고받을까?

 

     대표적으로 아파트 건설공사를 보자. 어느 업체가 100억에 공사를 따냈다고 하자. 그 업체는

바로 30억을 잘라 하청을 주고, 다음 업체는 다시 20억을, 그리고 그 이후는? 최종 업체는 건축,

전기, 설비 등으로 다시 나누어 주고 건설의 최전방 업체는 생존을 건 전투, 즉 중국인이나 조선족,

동남아인들을 대거 투입해 인건비 따먹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 규정을 따지면 할 말이

없다. 현실이 그러니까.) 근로기준법은 이미 그곳에 없다. 야간작업과 휴일근무는 당연하다.

     관례적으로는 한 달에 두 번 쉬게 해주지만 공기(工期)에 쫒기다 보면 그나마도 지켜지지

않는다. 두 달 세 달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근로자가 넘쳐나고 있다. 아파트 공사현장의

여관 등에는 공사인부들의 합숙소인 장기방(長期房)을 잡아놓고 철근, 전기, 형틀, 설비 등

팀을 이뤄 공사기간 단축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안전관리, 휴일근무수당 등은 이미 허울에

불과하다. 아파트 인부는 인격을 상실한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는

‘한국제’가 이미 아니다.

     안전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어느 대기업은 아예 공식적으로 안전사고 3건이면 해당

업체를 퇴출시키는 이른바 ‘삼진 아웃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니 대다수의 안전사고는

최전방 업체의 몫이며 비공식적으로 처리된다. 전가의 비정한 방화벽이 작동하는 것이다.

     자재는 어떤가? 모델하우스에 보여준 자재와 유사한 싸구려 자재를 몰래 설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더욱 그렇다. 반 토막도 안 되는 공사비는 필연적으로

부실공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영세업체들은 툭하면 부도가 나고, 비인간적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분양 후에도 하자보수에 몸살을 앓는다.

 

     건설 근로자도 똑같은 인간이다. 주 5일 근무에 40시간 노동을 시행하는 현실에서 건설

근로자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휴일에 그들의 가족이 있는 집에서 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률이 최고이고, 작년 9월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는 3년 연속 하락해 22위였다. 노사간 협력은 138위, 고용.해고 관행은 115위를기록한 부끄러운 나라가 아니라, 안전관리가 선행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근로자가 손을 씻고 점심을 먹고, 쾌적한 화장실을 쓰고, 냄새나는 몸을 씻고 퇴근할 수 있는

인간적인 건설현장은 꿈같은 일인가? 냄새나는 몸으로 죄인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을 헤아려 봤는가? 물론 법과 제도는 구비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부르짖는 현재의 정부에서는 더욱 어렵다.

 

     건설관련 자금은 규모가 크므로 한 번 제제를 받으면 충격이 클 것이다. 다만 이때 주의 할

점은 전가의 피해가 원청자가 아닌 하청업체에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시행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적인 것이다. 다만 이 제도의 시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안 할 뿐이다. 그들은 비자금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건설업체들이 일반관리비와 이윤, 그리고 기술혁신 등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리베이트 등의 비용을 줄이면 건설원가도 대폭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을 입에

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람들이 오늘도 그 먹는 양을 줄이지

않는다면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건설비리는 영원히 계속되고 때로는 범람할 것이다.

 

 

 

다. 경고제도의 신설  -< 계 속 >-

출처 : 만다라문학
글쓴이 : 공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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