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술집에서 게거품을 물고 정치얘기하며 떠들던 사람을 기억하는가? 내 회상의 망막 속에 비치는 한 인간이 그렇다. 어디 그뿐이랴? 가까운 아내, 형제, 친구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
어리석음의 대가는 혹독했다. 왕따를 시작으로 나는 세상을 겉돌았다. 돌이켜 보면 성공할 숱한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리석었기에 그 어리석은 자신을 알지 못했다.
무작정 상경해서 바닥을 떠돌다 본 공무원시험 합격은 나의 어리석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그래서 세속적인 기준의 요직이나 성공적인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문서담당, 보안업무, 서무 등등. 그 업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기준으로 말이다. 동료들은 구매, 회계, 조달, 인사, 공사계약 등등 나름 폼 나는 부서의 일을 하고 있었다.
관세청에 근무할 때도 동료들은 세관에 나가서 여러 가지 현장에 관련된 근무를 할 때도 나는 본청에서 당시에 한직이었던 기획, 국제협력, 번역 등의 일을 했다.
학연, 혈연, 지연이 판치던 시절에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어리석은 놈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혈연이야 그렇다 쳐도 나는 지연과 학연에서 완전히 버린 몸이었다.
그러다 나는 대전세계박람회로 파견 당했다. 파견 당했다란 표현은 파견이 나의 지원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직에서 왕따 당해 쫓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비로소 내 뜻대로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다. 초창기이고 신생조직이라 모두들 시키는 일에 익숙한 동료들과는 달리, 길들여지지 않은 나는 기획부서에서 해외홍보부서에서 일을 찾아서 했다.
나중에 감사받을 때 고생한다고 반대하는 상사와 동료들의 의견을 꺾고 준비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준비업무기록집을 만들고, 후꾸오까박람회 관련 책자들을 밤 세워 번역하기도 하여 배포하기도 하고, 서로 기피하던 해외홍보대행사 선정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업무상 많은 태클도 받았다. 파견업무 종료를 앞두고 내 업무에 태클을 걸었던 많은 동료들이 감사원 감사 등으로 징계를 받았다.
다시 본 부서로 복귀했을 때 나는 다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문화재 보수업무에 지원을 담당하는 업무였는데 기술직 40여명을 단순지원, 말하자면 심부름하는 직원이 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일반 업무가 아닌 사범단속반 등등.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내는 지금도 그 좋은 직장을 때려 치고 나와서 식구들 고생시켰다고 말한다. 퇴직 후, 숨 가쁘게 살아온 고난의 행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리석음의 표본이다. 동료들이 받는 연금도 안 되는 돈을 받고 근근이 살면서도 지금도 정의가 어떻다느니 하며 주둥이를 나불댄다. 지칠 만도 한데 말이다. 내가 나를 어찌 말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