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빚- 영원한 이방인6
[ 빛과 빚- 영원한 이방인6 ]
강훈 대표가 24일 오후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강훈 대표는 과거 스타벅스 론칭 준비팀을 거쳐 할리스 커피를 창업했으며 카페베네에 합류해 성공신화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망고식스로 자리를 옮겼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타살 혐의점도 없는 상황. 경찰 측은 회사 운영이 어려워진 상황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인터넷 뉴스 중에서
강훈 대표도 빛의 화려한 세계에서 점 하나를 잃어 빚의 세계로 떨어졌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제 그는 갔지만 빚이 준 상처로 인해 신자유주의라는 상어 떼에게 남은 자(가족, 가맹점 등)들은 세상 끝 날까지 시달릴 것이다.
빛은 행복으로 그리고 빚은 불행으로 인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빛에서 점 하나를 잃어 불행해졌는지 우리는 안다. 우리의 영혼마저 갉아먹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빚 앞에서 자살을 택한 인생 또한 고금을 막론하고 부지기수이다.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은 부조리하며 결론적으로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서 자살은 나쁜 방법이라고 말한다. 자살은 부조리 자체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부조리를 직시하고 껴안아야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아는가?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주장했다. 비록 신의 형벌을 받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바위를 메고 산 정상을 오르는 시지프스는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행복하다는 것이다.
첫째 시지프스는 자기가 올리는 바위가 다시 떨어질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인식조차 못하고 자본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그는 신의 명령에 대한 회피나 순종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해 혼신의 힘을 다해 바위를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셋째 미래는 없으며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소진해 버리겠다는 열정이다.
행복한 빚쟁이를 아는가? 나는 가끔 빚쟁이로서 행복하다.
첫째는 초기에 겪게 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시기를 잘 견뎌왔다는 것이다.
둘째 빚의 정체와 속성을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것은 부조리한 것이다.
셋째로 부조리한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노년의 안일을 막아준다. 더러운 빚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정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20년도 더 전에 처음 빚을 지던 때가 생각난다. 사업을 시작하자 경제신문에 창업자의 명단이 떴고, 그것이 모든 사기꾼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경제신문에 병아리 창업자로 나의 이름이 오르고 나서 숱한 사기꾼들의 방문을 받았다. 물론 그 때는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어리석었던 나는 많은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세상 사람들이 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 보험을 한다는 젊은이의 방문을 받고 보험을 들면 대출을 해준다는 말에 보험을 들고 대출을 신청했다. 생판 모르는 10여명이 만나 서로 맞보증을 해서 대출신청을 했는데 내 대출신청이 반려됐다. 부랴부랴 보험사를 방문해 맞보증을 취소하려 했으나 상대방은 이미 대출을 받았고 보험을 주선한 젊은이는 퇴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내 빚의 시작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경로로 대출을 받았는데 나중에 빚을 갚으려니 맞보증으로 연대보증을 선 빚과 동시에 갚아야 된다는 것이다. 내 빚만 우선 갚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나는 생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빚을 도저히 갚을 수가 없어서 내 빚마저 갚지 못하고 IMF 후에는 전국을 노동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연대보증이란 제도가 없어졌지만 나는 결국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빚을 거의 다 갚았지만 지금도 갚고 있다.
내가 <슬픈 인생>에서 젊은이의 자살을 소개한 일이 있다. 아직도 그 젊은이의 일은 마감이 되지 않고 있다.
빚은 죽은 자만을 공격하지 않는다. 소멸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늙은 아버지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고 상속포기에 대한 선택이 남아있지만 기력이 쇠진한 그분은 아직도 충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지낸다.
채권에 대해서도 말이 있었지만 채권은 소멸시효가 지날 때까지 침묵을 지킬 것이다. 자살이 보험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보험을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차량보험도 중간에 죽었으므로 보험사가 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채권은 숨고 빚은 조만간 아버지를 향해서 돌격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카뮈의 말이 아니라도 자살은 좋은 해결책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자살자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