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보르헤스 읽기-1(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쥬띠 2013. 11. 21. 13:49

   어제 나는 이교수를 만났다. 사람이 많아서 보르헤스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지만 그를 본 순간 혼자라도 우선 보르헤스를 읽고

정리하자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나는 픽션들에 나와있는 단편중에서 한권을 읽었다. 그것은 돈키호테에 관한 이야기다. 라만차에서 정의와 사랑을 찾아 떠난

슬픈 얼굴의 기사! 그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돈키호테도 아니고 산초판자도 아니고 바로 로시난테이다.

   다음은 내가 정리한 초고이다. 작품이 많으므로 단편들을 하나씩 읽고 정리하고 차차로 보강해야겠다. 너무 난해한 보르헤스를 향해

산초판자도 로시난테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오로지 이교수와 단독으로 만날 때를 대비해서....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1. 작품의 성격

    ○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지하에 묻혀있고, 진정으로 위대하고 탁월한 작품이며 우리들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며 권위 있는 인사인 남작부인과 여백작이 보증해준 작품.

    ○ 메나르가 수많은 작품 중에서 『돈키호테』란 작품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다. 쎄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우연의 산물이다.  왜냐면 필연이라면 그 작품이 없다면 커다란 결핍이 발생하고 그것과

       다르게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국 메나르의 『돈키호테』도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2. 이 글의 목적

     ○ 세상이 망가뜨린 삐에르 메나르의 명성을 회복하고 <넌센스>처럼 들리는 것 을 정당한 것으로

         논증해 보임.

     ○ 논증의 내용 :

         - 쎄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라서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책이므로,

            메나르는 또 다른 유사 『돈키호테』들이 아닌 『돈 키호테』 그 자체를 저술했다는 것.

         - 메나르의 단편 『돈키호테』는 쎄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오묘하며 필연적인

            요소들로만 이루워져 있다.

    ○ 보르헤스는 모든 작품은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끊임없이 독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작품 속에서 텍스트 속의 작가는 끊임없이 속 삭인다. 마치 음악이 지휘자에 의해 끊임없이

        재연주 되듯이....

 

3. 작품의 내용

     ○ 『돈키호테』의 1부 9장(다시 찾은 원고로 쓴 비스까야 사람과의 격투)과

          38 장(학술과 무술에 대한 연설), 그리고 22장(노예선의 노예들에 관한 일화)의 한 부분.

          - 9장과 22장에서 시데 아메떼 베넨헬리(원저자)가 등장.(모방이라는 증거)

          - 38장에서 소설에 대한 정의

     ○ 사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메나르의

         것이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고 문체마저 다르다.

         - 문체면에서 쎄르반테스는 스페인어를 자유스럽게 구사하지만 프랑스인 메나르 는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스페인어 고어체를 구사하므로 아무래도 부자연 스러운 면이 있다.

     ○ 메나르는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를 쓰는 지극히 쉬운 길을 버리고, 이 작품을 쓰기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수많은 원고를 쓰고 찢고 창작을 위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돈키호테』의 결정판이며, 일종의 양피지사본으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해왔다.

      ○ 메나르가 『돈키호테』를 쓴 양피지 밑에 수없이 고쳐써서 희미하게 보이는 흔적은 수많은 번민과

          고통의 흔적이며 보다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어서 분명히 쎄르반테스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세르반테스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4. 나의 생각

     ○ 이 글은 작가(창작/모방)의 글쓰기/읽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작가는 앞 저작물의 무한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메나르의 주장은 올바른 독자는 작품을 저자의 의도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읽어야/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억지스럽다. 하지만 메나르는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수동적 수용 이냐’,

            ‘능동적 창조냐’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묻는다.

     ○ 루마니아의 위대한 조각가 부랑쿠시의 무한주가 떠오른다.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척박한 고향

         ‘티루구지우’를 떠나, 걸어서 화려한 도시 파리에 도착 했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가 ‘로뎅’(모방)을 거부하고 고향의 대지에 수직으로 세운- 우주를 향해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듯 우뚝 솟아 있는- ‘무한주(無限柱)’(창조)를 떠올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처음의 원주를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동일한 원주를 무한히 쌓아 올리는

         시지프스적인 허무(인용, 답습, 모방)와 마주 선 창작자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진리의 궁극에 이르는 길을

         막아선 허무 앞에서 많은 작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아리랑은 그 종류가 수백 가지라 한다. 하지만 최근작은 물론 모든 아리랑 은 그 속에는 ‘나(我)를 버리고

    가시는(離) 님(郞)’이 들어 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아리랑(我離郞)이다. 가끔 내가 아리랑을 부를 경우 숱한

    양피지 속에 지워진 ‘아리랑’ 중의 하나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리랑은 듣는 사람마다 다른 아리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이별의 기쁨이나 만남의 슬픔을 노래한다면 그건 아리랑이 아니라. ‘너리랑’이나 ‘노리랑’이

    될 것이다.

    문학도 읽는 독자에 따라 숱한 작품이 생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