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나혜석의 [경희] (각색)

쥬띠 2014. 2. 20. 07:08

 

[ 경 희 ]

 

 

등장인물

 

이철원 : 주인, 경희의 아버지.

김부인 : 이철원의 아내로 경희의 어머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마에 주름살이 두어줄 보인다.

사돈마님: 김부인과 비슷한 나이로 뚱뚱하다.

경희 : 올해 19세로 일본 유학중에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옴.

오라버니댁,

시월이 : 주인댁 하녀로 점동이의 엄마.

떡장수 : 얼굴이 얽고 명주수건을 쓴 40정도의 여자

늙은 과부 : 유복자 수남의 엄마. 김부인과 20년 된 친구사이

건넛방 색시

 

1910년대

 

 

 

제 1 장

 

        (안채와 바깥채가 좌우로 보이고, 안채에는 안사돈끼리 서로 만나 막 인사 를 나누고 있다. 바깥채에는

        경희와 오라버니댁이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꽃 을 피우고, 그 곁에서 시월이가 빨래에 풀을 먹이고 있다)

 

안채

 

사돈마님: 아이구 무슨 장마가 그렇게 심해요?(담배를 피워 문다)

김부인 : 그러게 말이지요. 심한 장마에 아이들이 병이나 아니 났는지요? 그동안 하인을 한 번도 보내지 못해서

            궁금해요.(마주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사돈마님: 아이구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나 역시 그렇지요. 아이들은 충실하지만 어멈이 어찌된 건지 수일

          전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오늘은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왔어요.

김부인 : 어지간히 날이 더워야지요. 조금 잘못하면 병나기가 쉬워요. 그래서 좀 걱정이 되겠습니다.

사돈마님: 이제 나았으니까요. 마음이 놓여요. (갑자기 생각난 듯이) 그런데 아기가 일본서 와서 얼마나

           반가우셔요?

김부인 : 먼 곳에 보내고 늘 마음이 편치 않다가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오니까 집안이 든든해요.

            (담뱃대를 재떨이에 탁탁 친다)

사돈마님: 그렇다 말다요. 아들이라도 마음이 안 놓일 텐데 처녀를 그렇게 먼데다 보내셨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몸이라도 충실한지요?

김부인 : 네, 별다른 병은 없어 보여요. 자기 말로는 아무 고생도 아니 된다고 하 나 어미 걱정시킬까 보아

             하는 말이지, 얼마나 배고프고 고생이 되었겠 어요. 그래서인지 얼굴이 까칠해요. (바깥채를 향하여)

             아가! 아가! 서문 안사돈 마님이 널 보러 오셨다.

 

바깥채

 

           (오라버니댁은 버선을 깁고, 경희는 재봉틀에 자기 오라버니의 양복 속적 삼을 한다. 시월이가 빨래에

           풀을 먹이며 혀를 ‘툭툭’ 찬다)

 

경 희 : 네! (안채에다 소리친다)

오라버니댁: 어서 다녀오세요.

경 희 : 그래요. 내 얼른 다녀오리다.(웃으며 안채로 간다)

 

안채

           (경희가 사돈마님께 공손히 절을 하며 인사를 드린다)

 

사돈마님: (자애스런 음성으로) 아이고 그 좋든 얼굴이 어쩌면 저렇게 상했나? 오 죽 고생이 되었을꼬?(경희의

            손목을 잡는다) 손이 꼭 시집살이 한 손 같구나. 여학생들 손은 비단결 같다는데 네 손은 왜 이러냐?

경 희 : 살결이 곱지 못해서 그래요.(고개를 숙인다)

김부인 : 제 손으로 빨래를 하고 밥까지 해먹으니 그렇지요.(담배에 다시 불을 붙 인다.)

사돈마님: (깜짝 놀라며) 저런 그러면 집에서도 안하던 일을 객지에서 가서 하는구 나. 너 다니는 일본학교

            규칙이 그러냐?

경 희 : ……

김부인 : 무얼요. 지가 고생을 사서 하느라고 그러지요. 그런 것을 누가 시키면 하겠습니까? 학비도 넉넉히

           보내 주지마는 그 애는 별나서 그런지 바쁜 것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사돈마님: 저런, 왜 그리 고생을 하니?(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 적삼 위의 등도 토 닥이고, 얼굴도 쓰다듬어

          준다) 일본에는 겨울에 불도 안 땐다고 하지? 그리고 반찬은 감질이 나도록 조금 준다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사니?

경 희 : 네, 불은 안 때지만 견딜만해요. 반찬도 꼭 먹을 만큼 주지 모자라지는 않아요.

사돈마님: 그러자니 모두가 고생이지, 그런데 네 형은 그동안 병이 나서 너를 못 보러 왔다. 아마 오늘 저녁은

          오겠지.

경 희 : 네 좀 보내 주세요. 그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사돈마님: (안쓰러운 듯이) 암, 그렇지 너 왔다는 말을 듣고 나도 보고 싶었는데, 형제끼리 그렇지 아니하겠냐?

          거기를 또 갈거니? 인제 그만 곱게 꾸미 고 있다가 부자 집으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재미있게 살지

          그렇게 사서 고생할 것은 무어니?(경희어머니를 보며) 그렇지 않소? 내 말이 옳지요?

김부인 : 네, 그래도 하던 공부 마쳐야지요.

사돈마님: 공부는 그렇게 많이 해서 무엇 하니? 생긴 팔자를 바꾼단 말이냐? 군 사무소의 주사라도 한단 말이냐?

          지금 세상에는 사내도 배워가지고 쓸 데가 없어서 쩔쩔매는데…… (안타까워한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사돈마님과 경희가 객석을 향하여 대화를 풀 어 놓는다)

사돈마님: (방백) 아이구 저 계집을 누가 데려갈꼬? 어서 시집을 가거라. 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니?

경 희 : (방백)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구나. 작년에도 똑같은 소리 아니 었든가? 먹고 자고 싸는 것만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요. 배우고 알아 야 비로소 사람이지요. 당신 집안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도 다 배우지 못한 죄이지요. 그러니까 여자가

           시집가서 씨앗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 도 가르쳐야 하고, 아내를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무대 뒤에서 할머니 등장, 경희에게)

할머니 : (방백) 얘, 옛날에는 여편네가 배우지 않아도 복 받고 오래 살고, 사내아 이 많이 나서 잘만 살아왔다.

           자고로 여편네는 동서남북도 몰라야 복이 많단다. 얘, 공부한 여학생들도 보리방아만 찧게 되더라.

           사내가 첩 하나도 둘 줄을 모르면 그것이 사내냐? (할머니 퇴장)

 

            (경희형님 등장, 경희에게)

경희형님: 얘, 우리 시어머니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마라. 더구나 시집 이야기는 일절 하지마라. 여학생들은

          예사로 시집의 말들을 하더라. 아이구 망측 한 세상이지. 우리 자라날 때는 어떻게 처녀가 시집 말을

          할 수 있다더 냐? 그뿐 아니라 여러 여학생 험담을 어디 가서 그렇게 듣고 오시는지, 듣고만 오시면 똑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구나. 정말 내 동생이 학 생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듣기 싫더라. 일본 가면

          계집 다 버리느니, 차마 못 들을 말씀을 다 하신다. 그러니 아무쪼록 말을 조심해라.(경희형님 퇴장)

경 희 : (일어선다) 이따가 급히 입을 오라버니 속적삼 만지던 것이 있어서 가봐 야겠습니다.(사돈마님께

           인사를 하고 급히 바깥채로 향한다)

 

바깥채

 

경 희 : (방백) 시집을 갈 때 가더라도 하도 여러 번 들으니까 이제는 도무지 듣 기 싫어 죽겠다.(경희는 답답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마루에 올라선다)

오라버니댁: 왜 그리 늦었소?(깁고 있던 버선을 무릎에 놓고 바싹 다가앉는다)

            (경희가 눈살을 찌푸린다. 시월이는 빨래를 개키다가 눈치를 본다)

시월이 : 작은 아씨, 서문 안댁 마님이 또 시집 말씀을 하시지요?

 

           (안채, 두 사돈끼리 술도 권하고 담배도 피우면서 경희의 얘기를 계속 한 다.)

 

사돈마님: 아기가 바느질을 할 줄 아나요?

김부인 : 네, 바느질도 곧잘 해요. 남정네의 윗옷은 못하지만 자기 옷은 꿰매어 입지요.

사돈마님: (놀라며) 아이구 저런, 어느 틈에 바느질을 다 배웠대요? 양복 속적삼을 다 해요? 학생도 바느질을

            다 하나요? (방백) 그 바느질 꼴이 오죽할꼬?

김부인 : 어디 바느질을 편히 앉아서 배울 새나 있나요. 그래도 차차 철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싶어지나

           봐요.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더 군요. 어려운 공부를 하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나 봐요.(사이)

           양복 속적삼은 작년 여름에 남대문 밖에서 일본 여자가 가르치는 재봉 틀 바느질 강습소에 날마다

           다니며 배웠지요. 자기 동생들의 양복도 해서 입히고 모자도 해서 씌우고 또 제 오라버니 양복까지

           했어요. 일어를 아니까 선생하고 친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까지 다 가르쳐

           주더래요.

           낮에 배운 것을 밤이면 새벽 한 시까지 앉아서 배운 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고 모든 치수를 적었어요.

           나는 그게 무엇인가 하였더니 나중에 재봉 틀 회사 감독이 와서 그러는데 ‘이제까지 일어로만 된

           것이라서 가르치기 에 불편하더니 따님이 만든 책으로 퍽 유익하게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비로소 가르치는 책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역시 가르치면 어디든지 쓰일 데가 있더구만요. 그뿐 아니라 그 점잖 은 일본사람들에게도 어찌나

           존대를 받는지 몰라요. 그 사람이 경희가 왔 단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감독이 일부러 또 찾아왔어요.

           일본서 졸업하면은 꼭 저희 회사의 일을 보아달라고 하더래요. 처음에는 월급이 천오백 냥은 줄 수

           있대요. 차차 오르면 3년 안에 이천오백 냥은 받게 된다고 해 요. 다른 여자는 제일 많은 것이

           칠백오십 냥이라는데, 아마 그것은 일본 까지 가서 공부한 까닭인가 봐요.

           저기 유리창에 걸어 놓은 저 산수화도 경희가 재봉틀로 만든 겁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태도가 당당하다)

사돈마님: (방백) 네가 아마 큰 계집애를 버려놓고 인제 시집보낼 것이 걱정되니까 저렇게 칭찬을 하는 거지?

              (사이) 아냐? 감독이 왔었다고? 그리고 존대를 해? 설마, 월급이 군 사무소의 주사도 바랄 수 없는

              이천 량이란 것이 사실일까? 그래도 김부인이 거짓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저 유리창에 걸린 산수화도

              경희가 재봉틀로 만들었다지 않은가? 지금도 저렇게 재봉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고 있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여학생을 잘못 알아왔지. 정말 이집 딸과 같이 계 집애도 공부를 시켜야겠다. 어서

              우리 집에 가서 차별을 두었던 손녀딸들을 내일부터 학교에 보내야겠다.

             (건너편에서 젊은 웃음소리가 접시라도 깨뜨릴 듯이 재미스럽게 들려온 다)

 

 

 

제 2 장

 

           (안채, 주인마님은 돗자리에 누워서 부채질을 하고 있고 경희는 앞치마를 하고 김치를 담기위해 파를

           썰고 있다. 늙은 과부와 오라버니댁이 말 없 이 앉아있다. 옆으로 부엌이 보인다)

 

떡장수 : 이 더운데 작은 아씨는 무얼 그렇게 하세요?(떡 함지를 내려놓는다)

경 희 : 심심하니까 장난 좀하오.(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솜씨로 파를 썬다)

떡장수 : 어느 틈에 김치 담그는 것을 다 배우셨어요. 날마다 다니면서 보았는데 작은 아씨는 도무지 노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책을 보시지 않으면 글 씨를 쓰시고 바느질을 아니 하시면 저렇게 김치를 담그시고……

경 희 : 여편네가 여편네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신통할 것이 있소.

떡장수 : 작은 아씨같은 이나 그렇지, 어느 여학생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 이가 있 나요.(무릎을 치며 경희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경 희 : (빙그레 웃으며) 그건 떡장수가 잘못 안 것이지 여학생은 사람이 아니요? 여학생도 옷을 입어야 살고

           음식을 먹어야 살 것이 아니요?

떡장수 : 아이구 그러게 말이지요. 누가 아니래요. 그러나 작은 아씨같이 그렇게 하는 여학생이 어디 있어요?

경 희 : 저 칭찬 많이 받았으니 떡이나 한 스무 냥 어치 살까?

떡장수 : 아이구 떡 팔아먹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야요.

경 희 : 아니에요. 칭찬을 받으니까 좋아서……

떡장수 : 아니야요. 칭찬이 아니라 정말이야요.(너털웃음을 웃는다) 정말 몇 해를 두고 날마다 다니며 보아도

           작은 아씨처럼 낮잠 한 번도 주무시지 않고 꼭 무엇을 하시는 아씨는 처음 보았어요.

경 희 : 떡장수 오기 전에 자고, 떡장수 가고나면 자니까 자는 걸 못 보았지.

떡장수: 또 저렇게 우스운 말씀하시네. 떡장수가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아무 때나 다녀가지 학교 다니는

           학생같이 시간을 맞춰서 다니나요? (시월이 를 바라보며) 그렇지 않소?

시월이: 그래요, 어디가 아프시기 전에는 한 번도 낮잠 주무시는 일이 없어요.

경 희 : 여보 떡장수! 떡이 다 쉬면 어찌하려고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오.

떡장수: (힘없이) 아니 괜찮아요.

           (방백) 할 말이 많은데 매정하네. 뭣이냐 어느 여학생이 학교 간다고 나가 서는 안 들어와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니까 어느 사내의 첩이 되어 있더 란 얘기, 어느 집에는 여학생을 며느리로 얻어 왔더니

           버선 깁는 데 올도 찾을 줄을 몰라 모두 삐뚜로 기었드란 말, 밥을 지었는데 반을 태웠더란 얘기 등,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하고 받아만 주면 이야기보따리를 확 펼 쳐놓는 건데……

김부인 : 흰 떡 닷 냥 어치하고 계피 떡 두 냥 반어치만 내놓게.

떡장수 : (떡을 세어 놓는다) 작은 아씨 내일 또 와요. 호호.(자리에서 일어서서 나 온다)

경 희 : (방백) 떡장수가 다시는 내 앞에서 여학생 흉을 보지는 못하겠지…… 내 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호호!

늙은과부: (방백) 참으로 애기는 못하는 것이 없구나.(경희를 바라보며, 한숨을 꺼져라하고 쉰다) 아들이라고

          수남이 하나 있는 거 애지중지 키웠는데, 며느리라고 열일곱에 시집온 지 팔년이 지나도록 시어머니

          저고리 하나 지을 줄을 모르고, 도대체 배우려고 하지를 않으니…… 바늘을 쥐어주면 졸고 앉았고,

          밥을 하라면 죽을 쑤어오고. 아! 이집 며느리는 시어머니 저 고리를 저렇게도 곱게 만들고, 또 경희가

          저렇게 부지런한 것을 볼 때마 다 나는 왜 저런 민첩한 며느리를 얻지 못하였는가? 하고 한숨만 나오는

          구나.

경 희 : (방백) 저 여인은 또 자기의 며느리를 생각하는구나. 내가 가지게 될 가 정은 결코 그러한 가정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자손, 내 친구, 내 지인들이 만들 가정도 결코 이렇게 불행하게 하지는 않겠다. 오냐,

           내가 꼭 하고야 만다.(일어서서 시월이를 따라 부엌으로 간다)

           얘, 나하고 하자. 부뚜막에 올라앉아서 풀막대기로 저어댈까? 아궁이 앞 에 앉아서 불을 땔까? 어떤 것을

           하였으면 좋겠니?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니 너 하라는 대로 할 테다.

시월이 : (불도 때며 풀을 젖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아이구 그만 두셔요. 더운데. 아이구 이 년의 팔자. 그러면

           불을 때셔요. 풀은 제가 저을 게요.(작은 아씨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신이 난다)

            (방백) 저녁 진지에는 작은 아씨가 즐기시는 옥수수 맛있는 것을 얻어다 가 쪄드려야겠다.

경 희 : 그래, 그렇게 어려운 것은 오랫동안 해온 네가 해라.(불을 땐다)

경 희 : (방백) 풀이 ‘푸푸’하고 쑤어지는 소리, ‘부글부글’ 끓는 소리, 밀짚이 타며 ‘탁탁’ 내는 소리. 아!

           동경음악학교 연주회석에서 듣던 소리 같구나. 그리 고 아궁이 저 속에서 여기까지 불길이 강해졌다

           약하게 번지는 모양은 피아노의 음률과 어쩜 이리 닮았을까? 열심히 젖고 앉아있는 시월이는 이런

           재미를 모르겠지? 그러나 세상에는 나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나 묘한 미 감을 느끼는 자가 있겠지? 어머?

           시뻘건 불꽃이 저렇게 파랗게 변하다니! (부지중에) 참으로 재미가 있구나.

시월이 : 대체 작은 아씨는 별 것을 다 재미있다고 하십니다. 빨래하면 땟국물이 흐르는 것도 재미있다고 하시고,

            마루걸레질을 하시면서 남은 쪽마루 먼 지의 뽀얀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시고, 마당을 쓸면

            쓰레기 모아지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시고, 나중에는 무엇이 재미있다고 하시려는 지 요? 뒷간에 구더기

            끓는 것은 재미있지 않으셔요?

경 희 : (방백) 오냐, 그것까지 재미있게 보아야 하겠지만, 내 눈과 머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발달하지 못했으니

           불쌍하고 한심스럽다.

경 희 : 얘, 그런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빨래는 언제 하니?

시월이 : 왜요? 모레는 해야겠어요.

경 희 : 그러면 저녁때 늦어지지?

시월이 : 아마 늦어질 걸요.

경 희 : 일찍 끝나더라도 과천에서 더 놀다 와라. 그러면 건넌방 아씨하고 저녁 해놓을 테니 늦게 들어와 먹어라.

          그리고 내 손으로 한 밥맛이 어떤가 보아라. 호호호!

시월이: (방백) (웃으며)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인정이 많을까? 누가 참외라도 주 면 참외 좋아하는 우리 작은

           아씨께 갖다드려야지. 지난 번 일본서 올 때 우리 아들 점동이에게 큰댁 아기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사주셨는데……

경 희 : 얘, 그런데 너와 일할 것이 딱 하나 있다.

시월이 : 무엇이야요?

경 희 : 글쎄, 무엇이든지 내가 하자면 하겠니?

시월이 : 암요. 하지요.

경 희 : 너 왜 그렇게 우물 뚜껑을 더럽게 해 놓니? 도무지 더러워서 볼 수가 없 다. 그러니 내일부터 설거지가

           끝난 후에는 꼭 나하고 우물 뚜껑을 청소 하자. 너 혼자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겠니?

시월이 : 네, 제가 혼자 날마다 치우지요.

경 희 : 아니, 나하고 같이. 재미있게, 하하하.

시월이 : 또 재미요? 하하하하.

김부인: (안에서) 부엌이 떠들썩한 걸 보니 또 웃음이 시작되었군. (수남이 어머 니에게) 아이,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저 애가 오면 밤낮 셋이 몰려다니며 웃는 소리에 도무지 산만해서 못 견디겠어요.

           젊었을 때는 말똥 구르는 것이 다 우습다더니 그야말로 그런가 보아요.

늙은과부: 웃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댁에를 오면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한숨을 ‘후’하고

            쉰다)

건넛방색시: (한발에는 신발을 신고 한발에는 짚신을 끌며, 급히 부엌 문지방을 들 어서며)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오? 나도……

 

 

 

제 3 장

 

 

            (김부인이 안방에 쳐놓은 모기장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 다. 시간이 자정을 넘었다.

            사랑채에서 남편이 안방으로 건너온다)

 

이철원 : (안방으로 들어서며) 마누라, 주무시오?(모기장 속으로 들어온다)

김부인 : (깜짝 놀라 일어나 앉는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이철원 : 아니, 공연히 잠이 안와서……

김부인 : 왜요?

(시계가 ‘땡’하니 한 번 울린다)

이철원 : 드러누워서 생각을 하다가 당신하고 의논을 하려고 들어왔소.

김부인 : 무얼 요?

이철원 : 경희의 혼인 말이요. 도무지 걱정이 되어서 잠이 와야지.

김부인 : 나 역시 그래요.

이철원 : 이번 혼처는 꼭 놓치지를 말고 해야지. 그만한 곳은 없소. 그 신랑아버지 되는 자하고 나는 전부터

            익숙히 아는 사이니까 다시 알아볼 것도 없고, 그 아들도 그만하면 쓰지 별 다른 아이 어디 있겠소?

             장자니까 그 많은 재산 다 상속될 터이고, 경희는 그런 대갓집 맛며느리 감이지……

김부인 : 글쎄 나도 그만한 혼처가 없는 줄 알지만 지가 그렇게 열길이나 뛰고 설 치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렇게 싫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보냈다 가 나중에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생기면, 자식이라도 그런 원망을

          어떻게 듣자는 말이요……

이철원 : 아……니, 불길한 일이 있을 까닭이 있나? 인품이 그만 하겠다. 추수를 수천 석 하겠다. 그만하면 됐지.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요? 계집애 나이 열아홉이 적소?

김부인 : ……

이철원 : (혀를 차며) 내가 잘못이지 계집애를 일본까지 보내다니…… 계집애가 시 집가기 싫다니? 그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어? 남이 알까 무섭지. 벌써 적 합한 혼처를 몇 군데를 놓쳤으니 어떻게 하잔 말이야!

           아이……

김부인 : 그러면 혼인을 언제로 하잔 말이요?

이철원 : 저만 대답하면 지금이라도 바로 하지. 오늘도 재촉 편지가 왔는데…… 기왕에 계집이라도 그만큼 가르쳐

          놓았으니까 옛날처럼 부모끼리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벌써 사흘째 불러다 타일렀으나 도무지 말을 들어

          먹어야지. 계집년이 되지못한 고집은 왜 그리도 쎈지. 신랑 삼촌은 조카며느 리 삼겠다고 몇 번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김부인 : 그래,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소?

이철원 : 글쎄, 남들이 부끄럽게 계집애더러 물어본다나? 그러지 않아도 다 큰 계집 애를 일본까지 보내었느니

           어떠니 하고 욕들을 하는데, 그래서 생각해본 다고 했지.

김부인 : 그러면 거기서는 기다리겠소 그려.

이철원 : 암, 그게 벌써 올 정월부터 말이 있던 것인데, 동네 집 새악시 믿고 장가 못 간다더니……

김부인 : 아이, 그러면 속히 좌우간에 결정을 내야겠는데 어떻게 하나? 저는 기어 히 하던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때려죽여도 시집은 안가겠다 하는데, 그리 고 더구나 그런 부자 집에 가서 치맛자락 늘이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 다고해요. 그래서 제 동생 시집갈 때도 제 것으로 해놓은 고운 옷은 모두 주었습니다. ‘비단치마

           속에 근심과 설움이 있느니라’라고 하는 말도 있잖 아요. 그 말도 옳긴 옳아요.

이철원 : 그러기에 계집애를 가르치면 건방져서 못쓴다는 말이야.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그렇지…… 글쎄 그것도

          그렇지 않소. 오죽하면 집에서 혼인을 거꾸로 한단 말이요. 김판사 집에서도 우리 집 내용을 다 아니까

          혼인을 하자고 하지 누가 거꾸로 혼인한 집 새악시를 데려가려고 하겠소? 아니 야, 이번에는 꼭

           해야지…… (일어선다)

           (노기가 가득하다) 계집애가 공부는 그렇게 해서 무엇해? 그만큼 알았으 면 그만이지, 일본은 또 누가

           보내주긴 하구? 이번에는 기어이 혼처를 정 해야지. 내일 또 한 번 불러다가 말을 안들으면 또 물을 것도

            없이 해버 려야지……

김부인 : (방백) 따는 하나 남은 경희를 마저 내 생전에 시집을 보내놓아야 내 죽어도 눈을 감겠는데……

이철원 : (도로 앉으며) 그런데 일본 가서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요?

김부인 : 아니요. 그전보다 더 부지런해졌어요.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그 리고 마루 걸레질이며

            마당이며 깨끗하게 치워놓아요. 그뿐인가요. 떡할 때면 떡방아 다 찧도록 체질해 주지…… 그러게

            시월이는 좋아 죽겠다지 요.(사이)

            내가 아들의 권유로 경희를 일본에 보냈지만 늘 염려되는 것은 경희 가 만일에 일본까지 유학을 했다고

            잘난 체를 하든지, 공부한 위세로 사 내같이 앉아서 먹자고 하면 남부끄러워 그 꼴을 어떻게 볼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 경희는 그렇지 않았어요. 대견하게도 일본에서 돌 아오면 이튼 날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갔지요. 고것이 일 년 에 세 번 휴가를 오는데, 경희만 왔다 가면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다락 벽장까지 깨끗이 목욕을 하였지요. 그래서 다락이 지저분하던지 벽장이

            어수선하게 되면 벌써 경희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지요.(웃음 을 짓는다)

이철원 : (웃으며) 아들 말 듣길 잘한 것 같기는 하오. 나도 그래서 기특하게 여긴 다오.

김부인 : 이번에도 경희는 일본에서 오자마자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다락 벽장을 청소했어요.

이철원 : 그거야 매년 하던 것 아니요? 저희 할머니도 늘 그러셨지. ‘다락하고 벽장 이 분을 발랐구나’, ‘참,

            깨끗하기도 하다’하고 말이요.

김부인 : 그런데 이번 소제법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요. 가정학에서 배운 정돈, 위생학에서 배운 청결, 또

            미술시간에 배운 색과 색의 조화, 음악시간에 배운 장단의 음률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위치를 완전히

            바꿔 새로 정리 했어요. 자기를 도기 옆에다 놓아보고, 칠첩반상을 칠기에도 담아보고, 주 발 밑에는

            주발보다 큰 사발을 받쳐도 보고요. 그리고 하루하루가 크게 발전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대견한지요.

            아들 말을 듣고 일본 유학을 보 내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이철원 : 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오.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서며) 하지만, 내일은 세 상없어도 해야지.

             (마른기침을 한다)

 

             (새벽닭이 울고 날이 밝는다)

 

 

 

제 4 장

 

            (안마루에서 점심상이 차려졌다. 경희는 사랑채에서 나온다. 시월이와 건 넛방 형님은 간절히 점심

            먹기를 권하나 들은 체도 아니 하고 골방으로 들어서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흐느껴 운다. 경희는

            방바닥에 엎드렸다 가 일어났다가 벽에다 머리를 부딪치고 기둥을 끌어안고 빙빙 돌며 안절 부절이다)

 

경 희 : (독백) 아이고 어찌하나…… 이집에 있으면 밥도 축내고 옷도 사 입혀야 되니까 나를 쫒아내려나 보다.

          이 넓은 천지에 몸 하나 둘 곳이 없구나! (눈물을 비 오듯 흘린다)

          지금 내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중의 한 길은 쌀이 곡간에 쌓이 고, 돈도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가기도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 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다른 한 길은 내 팔이 부서지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게 되고, 종일 땀을 흘려 남의 일을 해주어야 겨우 몇 푼이라도

          벌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요. 사랑의 맛은 꿈에도 못 볼 것이 다. 발 뿌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돌을 밟아야 한다. 그 길에는 천 길 낭떠러지도 있고 날카로운 산꼭대기도 있다.

          아! 이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오늘까지 택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꼭 정해야만 한다. 오늘 택하면

          내일에는 다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교사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요. 친구가 충고를 해준다고 해도

          소용없다. 내가 택하고 내 정신으로 결정한 것이라야 후회가 없을 터이다.(사이)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어느 길을 택해야 당연한가! 어떻게 살아야 만 좋은가? 조선의 여자란 인습에

          파묻혀 있다. 여자의 생명은 삼종지도 라는 것이 가정교육이다. 여자가 일어서려면 주위가 모두 압박으로

          변하고, 움직이면 사방에서 욕이 돌아온다. 동무들은 한결같이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읍시다.’라고

          한다.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니……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이 몸에 비단치마를 늘이고 이 머리에 비취 옥잠을 꽂아볼까? 대가 집 맛 며느리는 얼마나 위엄스러울까?

          새아기 새색시 놀음이 얼마나 재미있 을까? 시부모의 사랑인들 얼마나 많을까? 지금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몸이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귀여움을 받을까? 친척인들 얼마나 부러워하고 우러 러 볼까?(사이)

 

           (회상 중에 사랑채에 있던 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 : 얘야, 이제 정하자.

경 희 : 안돼요.

아버지 : 너는 고생을 몰라서 그래. 아직 철이 안 났구나.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경 희 : ……

아버지 : 계집이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경 희 : 그것은 옛날 말이어요. 지금은 계집이라 해도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처럼 돈도 벌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어요.

아버지 :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 는 아니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싸 늘한 표정을 짓고 사라진다)

 

경 희 : (독백) 아! 잘못하였다. 왜 아버지가 ‘정하자’ 할 때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나? 왜, 부귀를 싫다고 했나?

          지금 당장 사랑방에 가서 아버지 앞에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고 공부도 집어 치우자. 그리고

          가지 말라는 일본도 다시는 가지 않겠다. 그래, 이 길을 밟을까 보다. 그러 나…… 아이구, 어찌하면

          좋을까? 아버지!(아버지의 무서운 표정을 생각하 고는 몸을 흠칫 떤다)

경 희 : (독백) 과연 그렇다. 나란 것이 무얼 하나. 남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아, 사람 노릇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남자와 같 이 모든 것을 하는 여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닐 것이다. 사천년의

           관습을 깨뜨리려고 나서는 여자는, 웬만한 학문과 뛰어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다.

           살아서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죽어서는 불란서를 구한 잔다르크 같은 백절불굴의 용맹과 희생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다. 내가 이제껏 배운 학문을 톡톡 털어서 모아도 별 볼 일이 없다.

           남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나 참으로 좋아할 줄을 모르고, 진정으로 웃어줄 줄을 모르는 나는

           백치에 불과하다. 한 마디 대답을 하 려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에는 조리가 없는 둔한 혀를 가졌다.

           조금만 괴 로워도 싫고, 조금 맞기만 하여도 통곡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이 사람 이 이러는 대로

           저 사람이 저러는 대로, 동풍이 부는 대로 서풍이 부는 대로 휩쓸려 다니는 나약한 의지를 가졌다.

           이것이 사람인가? 이것을 가진 위인이 사람 노릇을 하겠단 말인가? 이 까짓 남들 다 아는 ‘가나다라’ 쯤의

           학문으로, 그리고 남들도 다 지을 줄 아는 삼시 세끼 밥 먹을 때 오른 손에 숟가락 잡을 줄 아는

           것쯤으로는 벌써 틀렸다. 어림도 없는 허영심일 것이다. 만일 사업가의 부인들이 알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사이)

           김 판사 댁도 참 딱하게 됐다. 나 같은 천치가 그런 고귀한 댁에서 데 려가려고 하면 ‘네네’하며 얼른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싫다고 하는 것 은 내가 생각해봐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일가친척이 나를 볼 때마다 걱정들을 하시는 것이 당연할 만도 하다.

 

           (상념 중에 머리에 비녀를 꽂고 쪽진 부인이 지나간다)

경 희: (독백)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나? 남편에 대한 사 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만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구나. 자식을 사랑한다고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칠 줄은 모르는구나. 저것도 사람인가? (이내 힘이 빠 져서) 하지만 오늘은 저 부인이

          보다 훌륭하게 보이는구나.

          (상념 중에 설거지하는 시월이가 떠오른다)

          시월이의 머리에도 비녀가 쪽 져진 것이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 구나. 나한테는 이렇게 가기 어려운

          시집을 어쩌면 그렇게 많이들 가고, 나는 이렇게 어렵게 자식의 교육을 고민하는데 저들은 저렇게 쉽게

          살아 갈까? 어쩌면 저렇게도 쉽게 비녀들을 쪽지게 되었나? 어쩌면 저렇게 자 식들을 많이 나아가지고

          오순도순 잘 사나? 아! 저 부인들이 나보다 몇 십 배는 낫구나. (사이)

           그 부인네들이 훌륭한가? 내가 훌륭한가? 이 부인네들이 사람일까? 내 가 사람일까? 그러면 어찌하여야

           훌륭한 사람이 되나?

 

           (상념 중에 아버지가 다시 나타난다)

아버지 : 얘야, 그리로 시집가면 좋은 옷에 평생 배불리 먹다가 죽지 않겠냐?

경 희 : (벌벌 떨며) 아버지, 공자님의 말씀에도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 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먹고만 살다가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지요. 보리밥이라도

           저의 노력으로 제 밥을 먹는 것이 사람인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의 개나 같지 요.(아버지, 화가 나서 사라진다)

 

            (부지중에 경희는 모든 창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벽에 걸린 거울에 자기 의 몸을 비추어 본다)

 

경 희 : (독백) 그래, 저 거울에 비친 나는 금수가 아니다. 분명 만물의 영장인 사 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고귀한 사람이다. 아!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을 아주 잘했다. 그렇다 괴로움이 지나면

            즐거움이 있고, 눈물이 다하면 웃음이 오는 것이 금수와는 다른 사람의 이치다. 사람이 금수와는

            다른 것은 생각을 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버린 밥찌 꺼기를 좋다고 먹는

            금수와는 달리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얻는다. 이것이 사람과 금수와의 차이이고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다.(사이)

            나는 여자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또한 조선사회의 여자이기에 앞서 우주 안에 사는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부인의 딸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딸이다. (사이)

           오냐,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 정상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 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경희, 두 팔을 번쩍 들고 껑충껑충 뛴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치며 벼락이 번쩍인다.

           황홀감에 빠진다. 그대로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의 딸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저의 눈과 귀는 이렇게 활동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무한한 영광과 힘을 내려주십시오.

저의 있는 힘을 다하여 일 하겠습니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