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노자(勞者)의 노래(4)-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폭염뿐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 뿐
바위있고 물은 없고 모래길 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틈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속에 파묻힌다.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뱉는 썩은 이빨의 산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 T.S. Eliot, [황무지]중에서
나는 지금 '메타쉐콰이어' 가로수 옆에 서있다. 굴삭기는 도로 한쪽에 길게
도랑을 만들고, 나는 차량을 통제하고 있다. 신작로길은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뚫려 수지에서 신갈까지 이어져 있다. 동녘에서 떠오른 해가 가로수의
그림자를 서쪽으로 길게 펼쳐 놓았다. 그림자는 하늘의 구름과 휘뿌연 황사, 매연,
고속도로의 먼지 등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고, 해가 점점 떠오르자 조그마해졌다.
벌써 며칠동안 뙤약볕에 서있었으므로 나는 얼굴이 깜뚱이 사촌이 되었고
온종일 유일한 그늘인 가로수 그림자에 매달려 맴을 돌았다. 정오가 되면 그늘은
가로수 발목에 매달렸다가, 오후가 되면서 야속하게도 고속도로쪽 개울가로 조금씩
쪼금씩 사라지는 것이다. 그늘을 잃어버린 불쌍한 노자의 목은 연신 불을 토해내었다.
물을 마실려고 했으나 거의 떨어져 한모금도 못되었다. 따스한 물은 더욱 갈증을
돋군다.
"오오! 여기는 그늘이 없고 다만 폭염뿐,
잔인한 사월이 가고 계절의 여왕! 오월의 끝자락에서
물이라도, 시원한 물이라도 풍족했으면...... "
남쪽 도로끝에서 점하나가 보이는가 싶더니 '투스카니' 한대가 코앞으로 빠싹 다가온다.
내 통제봉을 무시하고 그놈은 으르렁거리며 슬금슬금 내 앞으로 지나간다.
짙게 썬팅한 차안에서 젊은 놈이 씨익 웃는다.
"야! 너같은 놈은 치여도 내가 눈하나 깜짝할 것 같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앞을 지나는 차의 꽁무니를 "툭"하고 때렸다. 그순간 차가 서더니
썬글라스를 쓴 젊은 친구가 밖으로 나왔다.
"씨팔! 뭐하는 거야? 너가 뭐야?"
그는 금방이라도 칠 것같은 표정으로 주먹을 휘저었다. 빨간 바탕에 하얀 야광띠가 쳐진
청소원복을 보고는 그는 나를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짜고짜 반말에 욕이라니... 오! 어찌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근원모를 무력감이 말문을 막는다.
"너는 왜 통제에 안 따르냐? 용가리 통뼈냐?"
말은 힘차게 뱉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힘이 빠졌다.
"뭐? 그래 용가리 통뼈다. 어쩔래? 니가 뭔데 도로를 통제하냐구? 재수가 없을려니까. 참..."
"아들뻘인데''''"
욱하는 것이 속에서 치밀었지만 본능적으로 참아야한다고 느꼈다.
"야! 너는 도로공사하는 것 보이지도 않냐?"
"안보인다 어쩔래?"
"젊은 것이..."
"젊은 것이? 니가 젊은데 보태준 것 있냐?"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진다. 작업반장이 달려와 말렸다. 싸우는 바람에 도로가
혼잡해져 버린 것이다.
엉겅퀴의 자색 꽃망울이 줄기끝에서 곱게 피어나더니 색깔이 점점 옅어지고 급기야
하얗게 변한다. 뜨거운 폭염에 바짝마른 꽃의 주둥이가 살며시 벌어지고 속에서 솜털이
솟아난다. 그것은 이내 커다란 솜사탕이 되었다가 한낯의 태양볕에 뽀송뽀송해졌다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드디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허공에 솟아오른 솜사탕은 햇볕에 반사되어 영롱한 보석이 되어 내 마음을 달래준다.
멀리서 관용차량 한대가 다가오더니 구청공무원이 내렸다.
"누구입니까? 싸운 사람이?"
젊은 공무원은 다짜고짜 들이댄다.
"전데요? 젊은 친구가 통제하는데도 막 지나가기에.."
"이 공사업체 이름이 뭡니까? 책임자 오세요."
반장이 황급히 쫒아왔다.
"제가 책임자인데요. 죄송합니다."
"당신, 공사하기 싫어? 왜 민원을 야기하는거야?"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께요."
반장이 계속 굽신거렸다.
차가 사라져 간다. 나는 통제봉으로 엉겅퀴 꽃망울을 함부로 쳤다. 깜짝 놀란
엉겅퀴들이 솜사탕되어 허공에 솟구친다. 석양에 물든 엉겅퀴 꽃망울이 내눈을
자극한다. 나는 연신 눈을 비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