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봉하마을 여행기

쥬띠 2014. 3. 10. 16:41

 

 

   토요일, KTX를 타고 수원역을 떠난 시각은 8시 55분이다. 쾌청한 날씨에 혼자 떠나는 홀가분하고

쾌적한 여행이라……. 얼마만의 여행인가? 참으로 벼르고 벼르던 봉하마을을 아내와 아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홀로 떠나온 것이다. 혼자라 더욱 좋다. 같이 동행해 보았자 서로 상념의 무게가 다르니

나에겐 방해만 될 뿐이다. 좌석에 부착되어있는 접이식 책상을 펴고 책을 올려놓은 다음, 스트워디스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옆에 놓으니 제대로 자세가 잡혀서 기분이 마냥 좋아진다.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노무현 대통령! 나는 노동판에서 늘 그를 생각해왔다. 언제나 내가 그를 찾아갔지만 때론 그가 날 찾아왔다.

나는 그를 위해 틈틈이 ‘신나는 쿠데타’란 희곡 한편을 써 두었다. 봉하마을에 가면 내 작품을 영전에 놓고

기도하리라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기회가 오자 포기했다. 나 스스로 내 작품에 자신이 없으니 오히려 누가 될

뿐이리라. 돌아가신 날이 2009년 5월 23일이고 토요일로 기억된다. 그날도 인력사무실에서 송출되어 S전자

공장에서 전기작업 중에 그 소식을 들었었다. 10시쯤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한참이나 푸르렀던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았었다.

 

   왜 나는 그에게 그토록 빠졌던가! 그가 동서의 화합을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한 얘기를 펼치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제 팔십 중반이 되신 작은 아버지께서 ‘너는 전라도새끼라 그런지

싸가지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김대중이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가 없어.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내 가슴에 선생을 가둬놓고는 못을 박아버렸다. 아직 살아계신 그 분을 생각하면 아직 심중에

쌓인 말을 밝힐 계제는 아니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부모는 경남 고성과 통영사람인데 결혼해서 직장을 군산에 자리 잡고 나를 낳았으니 내 형제들을

제외한 모두가 경상도 사람인 셈이다. 선거철이면 외삼촌이며 어른들이 “김대중이는 간첩이니 찍으면 절대로

안 된다.”라고 또 못을 박았다. 그 시절, 봄이면 한창 꽃다운 나이에 보따리 하나들고 서울로 떠나던 영자나

순이처럼, 서쪽의 척박한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을 한 것이 벌써 사십년이 흘렀으니……. 참 징한 세월을

앓았다. 남들은 모르리라. 경계에서 울었던 사람의 마음을…….

 

   내려오는 KTX에서 송기원의 ‘아름다운 얼굴’이란 작품을 읽었다. 나는 전에 ‘늙은 창녀의 노래’란 작품을

읽었었다. 꽃피는 봄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눈앞에 그 정경이 펼쳐지고 내가 그 속에 있는 듯 했다. 그 때

‘아,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까?’ 라고 말하며 감탄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다시 작가의 작품을 대하니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새삼 부러웠다. 송기원 작가처럼 많은 작가들이 젊은 날에 재기를 보이고 등단한다. 그런데

나는 육십이 다 된 나이에 작가가 되겠다고 떠들고 나섰으니 기가 막히다. 지금 생각해도 더욱 웃기는 것은

술집에서 등단장벽과 문단권력을 게거품을 물고 성토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문학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 이제 삼년이 되어가니 이제 슬슬 맥이 빠진다. 때론 절망스럽기도 한데,

실력도 부족하지만 나에게는 ‘한국은 금기가 팽배한 나라’란 인식이 트라우마가 되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은 날을 노동판을 전전했고 노동에 대해 많은 사색도 했다. 그런 연고로 멋진 노동소설을

쓰고 싶어서 나름 조사를 해보니 조사를 할수록 절망감이 앞섰다. 노동소설로 성공한 작가도 드물고 관련 도서도

드물었다. 도서관에서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찾았는데 수원지역의 도서관들이 그 책을 갖고 있지 않았고,

비슷한 경우로 내가 찾는 책이 공공도서관에 없는 일이 많았다. 바벨의 도서관처럼 없는 책이 없지만 오직 한 권,

진실의 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현실에서 나는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란 책과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란 책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차가 달그락 거리고 주위는 봄볕이 완연하다. 나는 송기원작가의 세 번째 작품인 ‘다시 월문리에서’란 작품을

읽으면서 ‘기가 막히군!’이란 신음과 함께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월행’을 읽으면서 모세관으로 빨려온 수분이

급기야 창틀에 맺힌 결로마냥 방울져 내리는 것이었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어머니가

자살을 했으니……. ‘아, 무슨 말을 하리오. 참, 징헌 인생도 있구나’라고 말하며 나는 책을 접었다. 그리고 눈물을

말아 올렸다.

   내 눈물의 본질은 무엇일까? 창밖으로 보이는 강에 물이 가득하다. 밀양강일까? 철교 밑으로 조그만 배 한척이

떠있는데 아마 한 사람의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나보다. 그렇다. 김대중 선생! 내 가슴 속에서 한 삼십 년은 사신

분이니 작가에 대한 감회가 더 할 수밖에…… 젊은 날 선생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보라매공원으로 여의도

광장으로 쫒아 다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숱한 인파 속에서 까마득하던 모습을 보려고 까치발을 하던

앳된 청년이 이제 그때 본 선생의 나이가 됐으니…….

 

   봉하에 도착한 것이 정오를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나는 봉하마을 입구에서 국화 한 송이를 이천 원을 주고

샀다. 묘역에서 헌화하고 참배를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듯 미처 정리되지 못한

상념들이 무작정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당신께서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기에 부관참시를 하고 주검에 치도곤을 가하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합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의 적들은 당신이 예수처럼 부활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지요. 당신의

가르침처럼 동과 서가, 남과 북이 형제처럼 서로 화목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무덤을 파헤치는

사람들은 오늘도 남북을 쪼개고 동서를 분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제 부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그저 다 잊고 명부로 돌아가시겠다고요.’

 

 

발가벗겨지고 파헤쳐진 주검 위에……

이제 그만 가시라고 국화 꽃 한 송이 놓아드렸네.

명박스럽고 창중스런 세상에서

미련 없이 떠나가시라고.

 

 

   방명록에 ‘외로워 마세요.’라고 써놓고는 미처 의미 있는 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왜 그렇게

썼을까?’라고 부엉이 바위를 한참이나 올려보며 생각했다. ‘아! 내가 외롭구나. 그래 내가 지독히도 외로운 게지.

그래서 홀로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봉하를 떠나기 전에 소머리국밥 한 그릇에 봉하 막걸리 한 통을 마시고 봉하 찰보리 빵 한 봉지를 기념으로

샀다. 올라오면서 ‘김원일’의 ‘마음의 감옥’을 읽다 작가의 약력을 보았다. 1942년생 경남 진영 출신이다.

‘진영?’ 아니 조금 전에 다녀온 진영? 봉하마을이 있는? 우째 이런 일이…….

 

   번듯한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잠시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봤다. 쾌청한 대구의 하늘이

방긋 웃는다. 기차는 KTX가 아니어선지 내려올 때와는 달리 동대구역을 지나 대구역에도 정차를 한다. 차창

밖으로 열심히 시가를 관찰해 본다. 국가의 부를 편식한 탓에 살이 오른 도시는 ‘우리가 남이가?’의 본 고장답게

완고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많은 지역을 다녀봤지만 소위 말하는 TK지역인 대구·경북지역은 거의 온 기억이 없다. 그래서 대구 경북지역은

참으로 낯설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은 높은 담을 둘러치고 대청마루에 돌아앉은 노욕에 찌든 영감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온다. 광주가 피바다가 돼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배타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까? 물론 이곳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저 가슴 아래부터

구정물이 피어오른다. 열차가 왜관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땅거미가 완전히 졌다. 거리의 가로등과 네온 불빛이

까닭모를 슬픔을 자아낸다. 문학도 그럴까? 잘은 모르지만 지역문제는 없으리라.

 

   이제 선생은 가셨다. 남들이 욕을 하건 칭찬을 하건 내 가슴속 문을 열고 표표히 가셨다. 마음 편하다. ‘이제

그 분도 보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 허니께…….’ 집에 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어리굴젓에 비벼 꿀맛 같은 밥

한공기를 뚝딱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