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수덕사에 다녀왔습니다
[수덕사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8월 10일, 일요일에 벼르던 수덕사에 갔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들어가니 수덕사 입구에 ‘덕숭산 수덕사’란 현판이 보이고 바로 옆에 있는 찻집에는 비구니 두 분이 커피를 마시고 있네요.
급한 마음에 나혜석이 3년간 머물었다는 수덕여관 쪽으로 방향을 트니 대문에는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수덕여관’이라고 새로 써진 현판이 아름답습니다. 마당을 돌아가는데 배롱나무에 꽃들이 흐드러지고 있고, 정문 입구 쪽 소나무 두 세 그루가 기상이 넘쳐 범상치 않습니다. 여관에는 이응로 화백에 대한 안내문과 그가 머물었던 여관방이 표기되어 있었지만, 나혜석의 자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숲을 스치며 들려오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만이 텅 빈 여관마당을 휘돕니다. 아이들 몇이 평상에 앉아서 깔깔거립니다. 정문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수덕여관 아래에 미술관이 있습니다. 안에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이 보이고 어느 전시회에서 보았던 ‘군무도’가 눈에 띕니다.
발길을 돌려 환희대에 오르니 ‘김일엽 선사상의 세계화’란 프랑카드가 법당입구에 걸려있고, 막 강연이 끝나선지 주지스님과 강연자 등이 법당 아래 요사채로 걸어갑니다. 커다란 프랑카드에는 ‘주최, 김일엽 문화재단/ 후원, 일엽문도회’라고 써있더군요. ‘아! 김일엽 문화재단이 있었구나. <수덕사의 여승>이란 그녀를 기리는 노래도 있고…….’ 환희대를 돌아서 나오는데 살아서도 수덕사란 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서도 머물지 못하는 나혜석이 안쓰러워 자못 슬픕니다.
나오는 도중에 낯이 익은 분이 있어 다가가니 ‘방민호’ 교수님이었습니다. 김일엽에 대한 강연회에 참석하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분을 특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나라 여성 1세대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나혜석을 얘기했고, 그분의 외할아버지인 고의화님이 나혜석의 그림 3점을 샀던 일화를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얘기를 하다보니 옆에서 서계시던 분이 어머님이셨는데 ‘아! 그분이 저의 아버님이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식이 너무 보고파서 서울로 올라갈 여비를 마련하러 그림 3점을 보따리에 넣고 아픈 몸을 끌고 수덕여관을 내려가던 초라한 여인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그림 속에는 그녀의 최후의 작품인 ‘수덕사’도 들어있었다는데…….
조금 더 올라가 나혜석이 김일엽을 만나러 자주 들렀다는 견성암에 들렀습니다. 작은 암자를 생각했던 나는 견성암의 규모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대한 석조건물이 좌우로 엄청나게 큰 건물들을 거느린채 서있더군요. 마침 근처를 지나는 비구니 스님께 물으니 지은 지 50년이 되었다더군요. 암자의 규모가 이럴진대 수덕사는 사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수덕세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덕숭산을 휘도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텐데 우리의 인간사는…….
저는 아쉬움에 수소문하여 나혜석에 대해 잘 안다는 평론가를 찾아 예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친구와 함께 역전 근처 막걸리집에서 기다리는데 차비가 없어 올수가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 이 무슨 황당한 시튜에이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예산 막걸리 두통을 비웠습니다. 허무한 마음을 뒤로하고 막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