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수필과 문약에 대하여

쥬띠 2015. 9. 15. 11:11

[수필과 문약에 대하여]

 

    학창시절, 정비석의 <산정무한>과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읽고 수필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 글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로 시작되는 신들린 듯한 문장은 지금도 다 외우고 있다. 마치 연극이나 뮤지컬의 대사와 같다. 또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리어왕이 광야에서 외치는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모질게 모질게 불어라! 불어라! ……라고 외치는 리어왕의 피맺힌 절규를 생각나게 한다. 팔십이 되어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 사랑하는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외치는 절규는 참으로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지금도…….

 

    일제라는 그 암울한 시기에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민태원의 힘찬 문구는 읽는 내내 내 가슴 속에서 시뻘건 석탄이 되어 내 마음을 증기기관차의 내연기관처럼 폭발하게 했다.

이상이라는 작가는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총독부 기관지에 <십이 십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뜻이 지금으로 말하면 ‘XX같은 쌍욕에 해당 했다. 그 후 이상이 총독부를 그만 두고 제비라는 다방을 열기 전에 ‘69’라는 이름으로 영업신청을 했는데 반려됐다. 성교장면을 연상시키는 상호명을 일제가 알았던 것 같다. 그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되는 <날개>라는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여왕봉과 미망인이란 표현을 통해 당시 조선의 남자들의 나약함을 질타하고 있다.

    물론 여왕봉은 나혜석을 이름일 것이다. 이상은 평소 나혜석을 좋아해서 그의 글과 그림을 다 읽고 감상하고 있었다. 이상도 글은 물론 그림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어서 화통한 나혜석과 취향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계약결혼을 했던 시몬느 드 보봐르가 나혜석의 글을 읽었다면 감탄했을 것이다. 여성에게 암흑 같던 조선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정조는 취미외다란 글과 실험결혼’, ‘정조보상 청구’, ‘현모양처론의 모순이란 글들을 썼으니……, 이상과 나혜석이 만났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생략하고, 이상은 미망인이란 말 뒤에 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서 미망인…… 라고 표현하여 뻔히 살아있는 조선의 기혼 남자가 다 죽었다란 의미의 말을 한 바 있다. 일본 동경에서 불령선인이 되어 요절한 이상의 눈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문약해 보였을 것이다.

 

    문약의 근본 원인은 두려움이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고려의 무신정권시대에까지 이르겠으나 각설하고, 가까이는 일제 강점기와 군사정권을 들 수 있겠다. 당시 조선의 숱한 인재들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국의 현실은 그야말로 척박하였다. 춘원 이광수를 잠시 생각해 보자. 그는 제일 먼저 창씨개명을 하고는 온갖 친일의 선봉에 섰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서 일제가 1년만 더 버텼더라도’, ‘일제가 망할 줄 몰랐다라느니 변명으로 일관해서 같이 재판을 받던 최린에게 그 입 닥쳐!’란 소리까지 들었다.

 

    나는 문약의 표본으로 미당 서정주를 언급하고자 한다. 혹자는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아니 그의 시를 사랑한다. 그의 시는 아마 지금까지의 한국 시인 중 최고가 아닐까? 내가 학창시절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는 물론 신라초, 화사집, 동천 등을 읽었고, 그분이 돌아가신 2000년 겨울에는 그분의 육성 시 낭독 테잎을 들으며 울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그분을 회고할 때마다 개운치 않은 감정은 어디서 연유할까? 그것은 그의 여러 가지 성격에서 비롯되고 그중의 하나가 문약이다.

    80년대 중반에 이란 잡지를 읽었다. 당시 그 잡지를 읽는 일은 체포사유가 될 정도로 핍박이 심했던 시절이었는데 그 잡지에 서정주의 친일시가 떡하니 실려있는 것이었다. ‘오장! 우리의 자랑마쓰이 히데오!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하늘이여내용은 조선의 청년군인이여, 일본항공대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어 장하게 죽어라정도의 내용이었다.

    그 후 그분은 일흔이 넘어서는 시점에 한참 아래인 전두환에게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쓴다. 나는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으니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라고 쓰며 단군 이래 가장 뛰어난 지도자라고 찬탄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19605. 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서정주는 잽싸게 신라초를 쓴다. 그리고 이후 숱한 시와 산문에서도 한국의 전통적 정서의 연원을 신라정신으로 보고 신라불교라는 정신적 지주를 바탕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늘 강한 자에게 알아서 기는 그의 행태를 볼 때 그의 신라정신이라는 것도 순수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신라정신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뒤로는 깊고 푸른 바다에 막히고 앞으로는 백제와 고구려가 버티고 있으니 우리끼리 똘똘 뭉치자는 것이다. 나라는 지키는 데는 유용했지만 나름의 한계도 지녔다. 그들은 중국 너머에 뭐가 있는지 꿈꾸지 않았다. 지구가 얼마나 크고 중국 뒤의 험한 산맥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서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자마자 그것을 서둘러 통일이라고 불렀다. 경계 밖의 민족은 알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정신의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보아야 이를 극복할 수가 있다. 일제가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세계의 변화에 동참할 때 쇄국의 빗장을 건 것도, 과거에 역사를 친일 식민사관으로 본 것도 그런 맥락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언젠가 전성태 작가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는 모름지기 작가는 처자식을 팔아먹고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작가는 문약해서는 안 된다고 고쳐서 이해했다. 이렇게 쓰면 누가 욕하지 않을까? 나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치부인데……, 아니면 혹시 편집자가 실어주지 않을까. 아니 노동시, 통일, 이념, 혹시 검열에……. 이제는 전성태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로도 이해하고 있다. 비록 국가로부터 수모를 당하더라도 바른 글을 쓰겠다는 정신. ‘동호직필이란 말이 언뜻 생각난다. 비록 그 실천은 어렵겠지만.

 

    요즈음의 수필들은 애매모호하거나 분식(粉飾)한 것들이 많아지고 그렇고 그런 수필이 범람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회적 사건을 보고 개탄하거나 감정을 피력하면서도 결론은 천사표로 천편일률적이다. 마치 신문 논설에 휴전선이 뚫리고 목함지뢰가 터졌다라는 사건에 어떻게 뚫렸는지, 경계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고, 열화상 탐지 레이더의 작동은…… 등등, 원인을 밝히고 책임소재를 밝힌 후 다시는 이런 일 재발하지 않도록 조사단을 구성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쓰기보다는 이럴수록 나부터 반성하고, 우리 국민 모두는 안보의식을 공고히 하고,……라고 쓴다면 그 논설은 얼마나 허망한 논설인가? ! 수필을 쓰는 이여, ‘문약에서 벗어나자.

언제부턴가 수필가는 고고하고 선하며 오욕칠정을 잘 갈무리하여 예쁘게 글을 쓰는 사람이다.’라고 은연중 생각하게 되었다. 수필이 퇴보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법정의 글이 왜 뛰어난가? 다름이 아니다. 그는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는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자연에게 부처에게 고백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대성당을 지은 사람들은 오로지 하늘을 의식하며 평생을 바쳐 대성당을 지었다. 대성당을 짓는데 오십년이나 백년이 걸리니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서도 그들은 성당 조각품들의 뒷모습마저도 신이 보실 것이기에 정교하게 깎았다. 인간의 시선에 집중했다면 어쩌면 보이는 부분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겸재는 최초로 인간의 시선이 아닌 신의 시선으로 금강산 전도를 그렸다. 인간의 시선이 어떻게 그런 시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수필도 그래야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수필가는 문약을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