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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의란 무엇일까?<8-3>

쥬띠 2011. 1. 12. 15:41

   무장지대는 언제나 싸움으로 얼룩진다.

   “소외씨! 이리 와 보세요. 지난 금요일 저녁 무단 방송한 거 있쟎아요? 시말서 써서 지금

제출하세요.” 미소를 짓는 소장의 입술이 살짝 떨린다.

   “그날 저녁 동 대표와 주민들이 찾아 와, 방송을 해 달래서 소장님께 전화를 드렸죠. 그런데

전화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방송을 해 줬죠. 동 대표가 공무라는데

방송을 해 줘야 되는 거 아네요?" 나는 반문했다.

   “그들이 뭣 때문에 방송하려는지 몰라서 그래요? 동 대표 회장과 나를 몰아 내려고

그러쟎아요.” 그녀의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모르죠. 왜 그러는지요. 기전실의 기사란 맡겨진 일만 하면 되지 않아요?”

 

   시말서를 쓰네 못쓰네로 실갱이를 했다. 소장은 동 대표 회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나를

바꿔 줬다.

   “쓰라면 쓰세요.” 동 대표 회장이 내 변명을 일축하고 최종 통보를 했다.

   “알았어요. 조금 생각해 보고요.” 나도 최종적으로 답했다.

 

   Y주임이 기전실로 찾아 왔다.

   “소장이 뭐래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시말서 쓰래요.”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시이~마알~써어~? 결국은 소외씨가 방송해 준 것이 결정타가 돼 버렸어. 아까 나보고

소장이 섭섭하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중립이다’라고 말해 줬지.”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그는 이미 소장이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다고 간파했음에 틀림없다.

 

   금요일에는 아파트 선거관리규정 때문에 구청에서 전화가 왔고, 어제는 경찰서에서 다녀 갔다.

선거관리위원장이 사표를 내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느니, 전쟁은 치열하지만 점점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경비초소에 들리니 경비가 한마디 한다.

   “그년도 나빠, 지난번 공사입찰 때도 동 대표 회장하고 소장하고 같이 업체사장따라 나가더니

이번에는 경비업체도 바뀌었쟎어? 새 업체가 퇴직금 안주려고 우리들 보고 다 나가라는 거야.

원, 더러워서. 아니 부려먹을 거 다 부려먹으면서, 안 짜를테니 돈 100만원에서 10만원을 깍자는

거여. 그게 말이 돼?”

 

   초소를 나오니 하늘에서 펑펑 눈이 내린다. 나는 현기증이 났다. 서둘러 비무장지대로 들어 왔다.

비로소 정돈되고 친밀한 세계가 나를 맞는다.

 

   ‘띠리링’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나 소장인데요. 방송할 일이 있으니 올라 오세요.” 대답도 듣지 않고 끊는다.

기전실 문을 열고 올라 오니 눈세계가 펼쳐졌다. 벽장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간

‘나니아 연대기’의 아이처럼, 나는 잠시 눈으로 덮여서 깨끗해진 세상에 가슴이 벅찼다. 아파트

가로등이 달무리 같은 빛을 뿌리며 켜졌고, 향나무와 주목이 흰 눈을 가득 머리에 이고서

푸른 빛을 뽐낸다.

   “7동에서 반상회를 할 거예요. 두 번 해 주세요.” 소장이 하얀 A4 용지를 건네준다.

   “어? 키가 없네.” 키 박스에서 키를 찾으니 소장이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준다. 다시는

방송을 뺏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인다.

 

   동 대표 회장은 이제 다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삼분의 이’ 이상 해당 동의 주민 동의를

얻은 상태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 기회를 갖고 동의를 철회해 달라고 동 주민을

설득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빵카 밖의 무장지대에서는 온갖 음모와 악의가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서둘러 나의 세계로 내려 왔다.

   “세상의 불똥이 이곳까지 튀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두렵기도 하다. 항상 담대하려 해도 ‘머피의 법칙’처럼 언제나 불똥이 나에게로 튀는 것이

운명의 장난같아서 한편으로 신기하고 괴롭다.

 

   꿈속에서 ‘형도’를 찾아 갔다. ‘기형도’는 천상병 시인과 소풍을 나와 있었다. 처음 만났는데도

그들은 나를 오랜 친구처럼 반겼다. 나는 형도가 친구로 생각되어 말을 걸었다.

   “형도씨! 잘 지내나요? 평온해 보이네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소외씨! 당신의 발송문을 보았어요. 딱딱하지만 충분히 이해해요.” 형도는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비무장지대에서 당신을 생각해요. 같이 이런 비무장지대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당신의 처절한 아픔이 뚝뚝 묻어나서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마치

내 살점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거든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내 사랑 빈 방에

갇혔네’란 구절도 생각나고요. 맞나요? 그리고 이번에 당신의 고향이 포격을 맞았네요.”

   “그러게요. 나를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비무장지대에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소외씨! 당신이 갇히지 않기를 기원할 께요.” 그는 앞서 가는 천상병 시인을 따라

가버렸다. 안개가 자욱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천상병 시인이 뒤돌아보고 웃어 주었다.

 

   잠시 깊은 잠에 빠졌나 싶더니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그는 하얀 수염이 얼굴에 가득

나 있었는데 몹시 깊은 생각에 잠겨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놀라지 말게, 소외군. 난 막스라네.” 그는 내가 놀랄까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 위대한 사상가, 칼 막스 선생님 아니십니까?”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나의 심장이

고동쳤다.

   “자네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군. 세상에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지.... 특히 자네가

사는 땅에서는 나를 ‘악의 괴수’나 유령취급을 하지.” 그는 슬픈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잘 모르고, 심지어는

당신의 어느 책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보이지 않는 음모에 의해 당신은

낙인 찍혀서 상품처럼 이 땅에 유통되고 있죠. 그들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당신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어렸다.

   “당신의 발송문을 보았네. 그리고 당신의 계획에 지지를 보내고 싶어. 나는 레닌,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네. 그리고 케인즈, 프리드먼 등과도... 그들은

나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는 나를 통해 참된 자유를 보았고 공산주의 나에게서

평등의 가치를 발견한 거야.”

   “이 땅은 불의가 넘쳐요. 전관예우로 로펌이나 변호사로 수임하는 과정에서 하루에 버는

돈이 우리 노동자의 1년 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자본주의자들은 당신을 최대한

이용했다고 생각하고 이제 당신을 폐기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바벨탑을

쌓기로 한 거예요.”

   그는 나를 그윽이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가 떠나갔다.

나는 그가 앉았던 자리를 맨손으로 팠다. 그리고 머리를 땅 속에 쳐 박고 소리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메아리 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나는 소스라쳐 놀라서 잠을 깼다.

   “땅의 소리가 하늘에도 들리나?”

 

   나는 다시 외계에 발송문을 보내고 땅으로 올라왔다. 높이 솟은 푸른 소나무에서 바람에

날린 눈송이가 하얗게 부숴지고 있었다. 아침의 햇살이 반사돼 무지개를 피우며 현기증을

일으킨다.

 

<발송문 2호>

   ‘정의 범위’를 ‘영혼’, ‘양심’, ‘진리’ 등과 연관시키면 그것은 철학이 되고 문제에 대한

문제의 제기에 그친다. 여기서는 정의의 범위를 시간(역사)과 공간(국외, 국내)적인 차원에서

고찰해 본다.

   1) 역사적인 관점

   인간은 하나의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살며 성인군자 등 일부를 제외하면 탐욕적

성향을 가졌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사회에 성인 열 명이 열 개의 빵을 생산했다고 치자.

처음에는 한 사람이 한 개씩 먹거나 비교적 고르게 먹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역사)이

흐르면 어느새 빵은 한 쪽으로 몰리고, 급기야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즉 전가가 필연적으로 발생해서 그 희생자가 나오며 이것이 고착되면

하나의 구조적인 계층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노예제도’는 이제 사라졌지만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장 현대적이고 발달된

나라인 미국도 150여 년 전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 노예들은 사회의 최하층을 구성하며

겨우 연명할 수 있는 정도의 빵을 먹었다. 로마 귀족의 호사스런 생활도 노예의 희생이

뒷받침이 되었다. 노예들이 생산한 결과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귀족이

착취해 갔다.

   봉건국가에서는 ‘농노(農奴)’들이 그 희생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봉건영주에

대한 무한의 봉사가 끝난 다음에야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농업사회의 전통이

깊은 동양도 예외가 아니며 우리나라도 또한 그렇다. 조선시대만 해도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엄격하였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그 부담을 마련하다가 굶주리고,

결국 유민이 되어 떠돌던 일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를 힘으로 누르고 식민지를 만들었다.

신대륙을 발견(인디언 입장에서는 웃기는 얘기지만)한 ‘콜럼부스’가 원주민과 대등한

방법으로, 즉, 정의롭게 거래하지 않았듯이, 그들은 신대륙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닥치는 대로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저항하는 약소국들의 주민들을 함부로

죽이고 ‘금’, ‘석유’, ‘다이아몬드’ 등을 빼앗아 갔다. 심지어는 그 결과로 피정복지의

문명이 살육과 성병 등으로 어처구니 없게 사라지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노예’ 등 일부의 특정 계층이 희생의 대가를 치렀으나

점차 그 강도와 범위가 넓어져서 결국은 불특정 다수에게로 전가가 이루어 졌다.

전가의 피해는 광범위하고 그 상처도 깊었다. 시간이 흘러도 인간 탐욕의 강도는 줄지

않았다. ‘아벨’을 죽인 ‘카인’이 아직도 손에 돌을 들고 있는데 어떻게 정의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최근 프랑스가 보관중이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한국에 임시 대여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로운 나라인 프랑스의

것이다. 그래서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정의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강대국의 흥망사에 다름 아니다.

   지금도 전가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약한 자들은 더 약한 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선택의 자유’, ‘공동선’ 등은 일견 매우 정의로워 보인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가진 정의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의 윗면을 바라보았으며

적용하려면 언제나 시차(時差)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공간적인 관점

      국제적으로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며,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인종청소’란 이름으로 학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중국정부가 ‘6.25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말하고, 북한이 ‘핵을

보유할 권리’에 대해 당당히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강대국의 이전투구의 장이 되었다. 그러다 그들은 정의롭게

다툼을 멈추고, 황금 대륙의 지도를 놓고 자로 반듯 반듯하게 경계를 그었다. 일부는

팔꿈치로 쳐서 삐뚤어 졌지만, 탐욕으로 마음이 급한 그들은 그대로 국경을 확정 시켰다.

아프리카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흑인들은 전가의 그늘아래 매우 가난하다. 그 많은 풍요는

누가 가져갔는가?

      지금의 중동을 보자. 검은 황금인 ‘석유’로 인하여 수많은 강대국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대 자본으로 왕조의 실력자들을 매수하거나, 때론 무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로 오늘의 중동은

종교문제 등과 겹쳐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향노루는 그 사향 때문에 평생을

사냥꾼의 노림 아래 사는 것처럼, 어쩌면 중동은 지금도 솟아나는 검은 황금 때문에

정의의 사각지대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교’로 대변되는

중동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W. 샤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편견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4대문명이 다 서양이 아닌 곳에서

비롯되고, 동양이 더 휼륭한 문명을 가졌지만 그들은 힘을 앞세워 끝없는 편견을

키워갔다. 약탈자들은 한편으로 그들의 노획물을 빼았으며, 한편으로 그들에게

불의를 전가하는 것이다.

      현재의 강대국은 ‘정의의 주도자’들이다. 그들의 이론이 정설이 되고 전가의

희생국들은 ‘정의의 수용자’이다. 우리는 어떤가? 해외의 유학파들이나 유명

교수들마다 선진국을 들먹이며 툭 하면 그 이론을 전파하기에 급급하지 않는가?

      오늘의 세계는 ‘지구 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강대국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이산화 탄소(CO2)’가 온난화의 주범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이산화 탄소의 배출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산화 탄소로 세계를

오염시킨 주범은 누구인가?

      우리는 북한의 ‘핵’ 때문에 안보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핵도 북한이 먼저

만든 것도 아니다. 강대국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핵이 세계평화의 위협이

된다’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최근 ‘위키 리크스’의 폭로에 의하여 미국은 북한의 핵문제를 ‘미사일

방어체재(MD)의 구축’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은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북한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지만, 언제나 정의를 위한다는

신사적 위엄도 유지할 것이다. 바야흐로 강대국들은 이제 한반도를 볼모로 한바탕

힘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본 오늘날의 정의는 힘이 지배하고 있다. 비록 ‘이것이 정의다’라고

여겨지는 것도 힘을 가진 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정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힘을 가진 국가는 약한 국가에 오늘도 전가를 계속하고 있다.

      한 국가의 내부도 또한 그렇다. 겉보기에는 매우 화려해 보이는 중국의 성장도

그 이면에는 일년에 우리 돈 20만원도 안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하는 대다수의 농민과

그런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힘든 삶을 사는 농민공(農民工)들의 희생이 뒷받침이

되었으며 중국 내부의 심각한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힘을 가진

권력자들, 돈을 가진 기업가들, 말을 가진 언론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때론 화해하며 전가의 주도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힘이 정의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한다. 바로 정의의 아래를 보고 있으며 지역적이며 계층적인

한계성을 갖는다.

 

   나. 전가    -<계속>-

출처 : 만다라문학
글쓴이 : 공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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