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 소장이 기전실에 내려왔다. 그녀는 S주임의 수도관 동파사고의 책임을 묻기
위해 급수탱크의 알람장치를 조사하고 돌아갔다.
“아니, 사고 나면 기사만 잘못했어요? 왜 관리자들은 책임을 안 져요? 그리고 알람장치도
제대로 작동 안 했다 구요.” S반장은 시말서 쓰기를 거부했다. 동대표의 압력에 소장은
지금 S반장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덕분에 나에 대한 시말서 요구는 아직 잠잠하다.
Y주임은 언제나 빨갛게 코팅된 목장갑을 끼고 손에는 ‘스패너’나 ‘챌라’ 등 연장을 꼭 들고
다닌다.
소장과 과장은 법적으로 꼭 두어야 한다. 전기를 선임해야 하므로 전기 자격증이 있는
과장은 꼭 필요하다. 경리도 큰 아파트에서는 꼭 필요하고 기사는 밤에 아파트 시설을
지켜야 하니까 꼭 필요하다. 그런데 Y주임은 없어도 돌아간다. 그래서 뭔가 늘 보여주려
애쓴다. 똥 마른 강아지처럼....
일요일 오후부터 눈이 나린다. 기전실 밖은 눈으로 코팅되어 온통 하얗다.
“무장지대도 휴전중이겠지........ 다 잊자. 그리고 무장지대 너머로 <발송문>을 보내자.”
요즘 우주와의 교신이 잘 안 된다. 누군가 방해전파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쓴 시(詩)가 슬며시 사라졌다. 생각은 엉뚱한 데로 자꾸 튀어간다. 글이 방향을 잃은 것이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의 모임’에 빠졌다. 근무가 겹쳤기 때문이다. 강물이 빨리 흐른다.
가까운 곳에 폭포가 있다. 나는 지금 강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구멍난 가슴에.....’ 음악이
흐른다. 나는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프다.
해마다 쉬지 않고 아파트를 지어댄다. 아파트를 포함하여 서민들을 위한 임대주택,
보금자리 주택 등은 이미 모든 백성이 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양이다. 자꾸 이야기가 샌다.
그럼에도 만화방, PC방, 찜질방, 다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등 집이라고 볼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주거난민’이 급증하고 있다.
유태인 수용소 근처에 교회가 있었다. 수용소 굴뚝에서는 매일 시체 타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수용소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교인들 누구도 굴뚝의 연기와 냄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랑, 이별, 눈물을 노래하고 희망을 꿈꾸는 것도 좋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가 없다.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것은 사고의 자유로운 흐름을 담아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 스스로 ‘터부’를 만드는 것이 옳은가?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어서 아름답다.
‘만다라’는 무엇인가?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두루 담아내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세상
고통의 소리를 보는 관세음(觀世音)의 마음이 아니던가? 부족한 사람의 글은 담아낼 수 없는
편협한 그릇이었던가? 196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존 스타인벡’은 대공황으로
고통 받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소설로 그려냈다. 그것은 순수문학이 아닌가? 남미를 비롯한
숱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이 현실의 아픔을 노래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은 시인,
소설가 조세희, 조정래 등.....
‘순수’란 무엇인가? 아픈 시대에 아파하는 것이 순수가 아닐까?
IMF때에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 우연히 덕수궁근처의 구세군회관을 지나는데, 정문에
‘다일사(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임)란 간판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니 넓은 사무실을
치우고 책상과 의자 등을 갖다 놓았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책이며 신문을 마음대로 보고
컵라면과 새우깡 같은 것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나는 그 때 안식을 느꼈으며 정부를
생각했다. 그리고 구세군의 고마움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순수란 그런 것이 아닐까? 아픈
사람을 같이 아파하는 것 말이다.
금기가 많은 대한민국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피카소, 베토벤, 괴테,
아인슈타인, 슈바이쳐, 처칠, 간디, 뉴턴, 니체, 나폴레옹,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존 메케인 등의 인물들이 나올 수가 있을까? 그들은 모두 왼손잡이다. 왼손을 쓰면
어릴 때부터 혼나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창의성이 자랄 수 있을까? 노벨문학상을
지향하면서 스스로의 금기를 정하는 문학풍토에서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발송문>을 마무리해야 한다. 부족한 걸음마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또한 오늘 밤에
우주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발송문 8호>
다. 경고제도의 신설
전가문제의 세 번째 과제는 ‘의무위에 잠자는 자’에 대한 경고제도의 신설이다. 마치
운동경기에서의 심판을 두는 것처럼, 정부내부가 아닌 외부의 위원회나 중립적 기관을
두어 전가의 피해자인 불특정 다수인들의 대변자를 두는 것이다. ‘시민 옴부즈만’제도와
비슷한 것 말이다. 의무위에 잠자는 자를 그 피해자가 직접 제제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특정 소수이고 전가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적 고찰이 필요한데 ‘권리위에 잠자는 자’와 ‘의무위에
잠자는 자’의 형평성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자가 생업에 쫒기거나 무식해서 혹은 법 규정을
몰라서 등의 숱한 이유들로, 즉 권리위에 잠잤다는 이유로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때,
똑같은 이유로 의무위에 잠자는 자에게 패널티를 가할 수 있어야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툭하면 규정이나 예산 탓만 하면서 게으르기가 한이 없는 자들에게 전가의
피해자가 ‘엘로 카드’를 발부할 수 있어야 형평에 맞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개인이 금융기관이나 혹은 국가에 보험금이나 잘못 낸 세금을
안 찾아 간다고 치자. 결국 권리위에 잠잤으므로 소멸시효에 걸렸다고 하자. 그 돈은
금융기관이나 국가가 가져가는 것이 합당한가? 그 금액이 불특정 다수의 돈일 때는 전체
금액은 무척 클 것이다. 과거 모 대기업이 휴면보험금으로 비자금을 마련했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날처럼 컴퓨터가 잘 갖추어져 있고 보험가입 때 온갖
개인정보를 확보한 그들이 돈을 못 돌려준다는 것은 모순이다. 반환에 필요한 경비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돌려 줄 수 있도록 행정지도나 제제 등을 시행하여야 한다. 이 방면에도
많은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흡한 면도 많다.
공공주차장이 없는 서민 주택가의 이면도로에서 주야로 불법주차 단속을 할 때, 주민들은 ‘
스티커’를 피하기 위해 자동차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나? 자동차 관련 세금을 잔뜩
거두고서도 인근에 공공 주차장을 전혀 확보하지 않은 자에게 어떻게 스티커를 발부할
것인가? 국세의 10%이상을 차지하는 교통세를 거두고도 예산 탓을 하는 후안무치가
계속 용납되어야 하나? 모범고용자인 정부기관이 장애인 고용을 기피하고, 영세사업자에게
신용카드 사용을 강제하면서 막상 공공기관이 신용카드로 공공요금 등을 받는데 소극적인
현상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위에 잠자는 사례’로 ‘스티커’가 불특정 다수에게 발부된다면,
전가의 대변자인 중립적 기관은 그 제제 등에 대해 경고를 하고 스티커를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
4. 결어
지금의 정부는 ‘소프트 파워’대신에 ‘하드 파워’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정보의 편중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부를 지나
문민정부를 지나는 시점에서 현 정부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둘의 혼합이라는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정부가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일수록 언제나 안보가 다른 문제를 누르고 수면위로 부상한다.
과거의 권위주의 정부아래서 얼마나 안보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살았던가? 그 모든 ‘스트레스’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큰 비용일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안보로 불안해야 한다니 슬픈 일이고
어린아이처럼 미국의 치마폭에 늘어지는 것도 볼상 사납다. 그나마 한미공조도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전략무기 구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확대’ 등 미국의 이익에 종속되는
것이 현실인데도 말이다. 전문가들 중에는 한반도를 제3차 대전이나 제2의 6.25전쟁의 후보지로
꼽고 있다. 대량 살상무기 색출이라는 명분아래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한반도에서
어떤 명분으로 북한을 공격할 지도 모른다. 미국은 자기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고 전쟁 억지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자금을 앞세워 싸움의 불씨를 살리려고 노심초사하는 미국의 군수산업에 한반도가 희생양이
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남북한만이 무한책임을 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루저’들은 역사 이래 가장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말할
기회조차도 박탈되고, 그들에게 닥친 가혹한 현실 앞에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가
백수천지이고 그나마 많은 일자리들은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 KTX 여승무원들이 3년
이상을 투쟁해서 겨우 1차적으로 승리했다. 처음 2년이던 비정규직의 고용기간을 3~4년으로
늘리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 그 법안이 통과되면 다시 판결이 뒤집어 질 수 있다고 한다.
상식적인 사안마저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정부가 하루의 품을 팔기위해 꼭두새벽에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는 것을 알까? 그들의 임금이 얼마인지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