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이제 갈 길을 잃었다.
조그만 농장 안에서 풀을 뜯어먹던 자본이 점점 자라서 이웃의 농장도 팜파스의 초원도 뜯어먹는 존재가 되었다. 덩치가 산만큼 커진 론스타란 자본이 외환은행을 처먹고도 우리 정부에 더 달라고 윽박지른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의 검찰은 해방 후 정부라는 체제의 충실한 버팀목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공수처가 ‘최적의 해(解)’가 아닐지라도 차선책은 될 것이다. 누가 검찰조직을 공무원 조직이라고 보겠는가? 자본이라는 달콤한 풀을 찾아 법관과 검사는 자기들 스스로 공무원이라는 의식을 버렸을 것이고, ‘김앤장’을 기웃거릴 것이고, 자주 찾던 룸사롱 주변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한 번 맛들인 것에서 절제하거나 검소하기가 어려운 존재다. 우리는 살을 빼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지만 실패하기 일쑤고 절제하려 하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고삐 풀린 망아지나 제벌 2.3세들처럼 다시 이웃집 정원이나 넘보는 망아지가 되고 뽕쟁이가 된다.
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를 거쳐 성숙단계를 지나 ‘황음무도’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바벨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신이 하나의 말을 아홉 개로 만들어 서로 싸우다 바벨탑을 무너뜨렸듯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갈브레이드‘가 예견한 ’불확실성의 시대 한복판에 있다. 코로나19는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의 탐욕이 바벨의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갈 것이다.
마치 우리의 정치가 태극기의 펄럭임을 보고 쫒아가듯이 구습을 좆을 것이다.
이 모두가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그건 간단하다. 우리는 모두 자본에 종속되었거나 마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머리로는 어렴풋이 깨닫겠는데 너무도 오랜 종속으로 파킨슨 환자처럼 허우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