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인터넷에서 포장이사업체를 찾아 견적을 받아보니 금액이 너무나 셌다. 수소문 끝에 바로 전 우리 집의 이사를 했던 이사업체를 찾아 바로 계약금을 걸고 지난 11월 말일에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사 전에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많은 물건을 버렸다. 이사할 때면 행사처럼 부부싸움도 했다. ‘웬 짐이 이렇게 많아?’가 싸움의 주제였고 결국은 어쩔 수가 없었다는데 동의를 하고 싸움은 마무리 됐다.
이삿날은 비가 내렸고 아침 8시에 이사를 시작했다. 순조로워 보이던 이사도 결국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무리가 덜 된 상태에서 이사업체에게 잔금을 주고 나머지는 우리가 정리하겠다고 하며 돌려보냈다. ‘부자 되세요.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 된데요.’란 말을 남기고 여자 사장은 떠나갔다.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젊은 것도 아니니 부자 될 가망성은 없지만 웃음이 나는 듣기 좋은 말이었다.
다음 날, 퇴근을 하여 짐을 정리하다 베란다 창고에서 ‘발렌타인 30년산 케이스’를 발견했다. 반가움에 속을 보니 술병이 사라졌다. 10년 전쯤 사위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선물한 것을 술 장식장에 두지 않고 드레스 룸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었다. 부리나케 이삿짐업체에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은 드레스 룸을 담당했던 팀장을 바꿔주었다. ‘사장님! 해도 너무하시네. 술병이 케이스에 있지 않고 드레스 룸에 굴러다녀서 버린 줄 알고 재활용장에 버렸는데 그렇게 화를 내세요!’ 나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너무 늦어서 쓰레기봉투와 재활용품은 우리가 치우기로 했는데 케이스에 단단히 들어가 있는 ‘발렌타인 30년산’ 술병만 치웠다니? 너무도 뻔뻔한 말에 할 말을 잊었다. ‘우리는 그게 그렇게 귀한 술인 줄로 몰랐고요.’ 계속 태연하다. 그냥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삿짐 업체직원이 고객의 물품에 손을 대다니? 그리고 빈 케이스를 보고 알았지, 빈 케이스 채 가져갔으면 한두 달 후에나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사장에게 직원을 절도로 고발하고 인터넷에 그간 벌어진 일을 글로 올리겠다고 말했고 사장은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직원이 빌지 않은 것은 괘씸했지만 영세업체에 맡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연말에 직원들과 회식을 했다. 코로나19로 두 조로 나누워 간단한 식사와 술자리였는데 ‘차라리 그 술을 이런 자리에라도 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에 그놈의 술이 그렇게 아쉬웠다. 이삿짐 업체 직원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비 오는 날 12시간 넘게 작업을 했으니 술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그 팀장 말대로 그 술이 그렇게 비싸고 좋은 술인지 몰랐다는 말도 진심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불현듯 ‘아끼면 똥 된다.’란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늘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발렌타인 30년산’ 빈 케이스를 보면서 ‘아끼면 똥 된다.’란 말을 음미하다가 ‘그래, 어디 술뿐이랴. 나의 못난 재능, 몸뚱이도 아끼면 안 되겠다. 타다 남은 동강이는 쓰일 곳이 없다. 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인색한 나’를 깨닫게 해준 이삿짐 업체의 뻔뻔한 팀장에 대한 미움도 비로소 사라졌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