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장벽을 헐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었다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가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었다네
나는 사람이라네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 날의 광명이 비쳤네.
<노라>
4남매 아이들아, 너희들이 외교관이 되어서 프랑스 파리에 오거든 에미 무덤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다오.
- 파리에서의 유언 -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거라.
너의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드니라.
- 유언 -
누군가 밖에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한 여인이 서있었어요.
손짓을 해서 다가가니,
'진이야, 내가 누군줄 알겠니? 가까이보니까 아버지를 빼닮았구나' 그러세요.
누구냐고 물으니 '내가 네 어미다'라고 하시더군요.
울면서 계속 말씀하셨지만 저는 혼이 달아나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았어요.
꿈 꾼듯 멍하니 교실로 들어갔죠.
- 둘째 아들 '김진'의 회고-
신교동 집에는 나혜석의 원고가 50cm 넘게 쌓여 있었고
그림도 여러 점 있었다.
<나부>라는 제목의 누드는 어머니가 벽에 걸면 창피하다고 다락에 숨겨 뒀다.
그러나 6.25 때 피난에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 조카 나영균씨 증언 -
하나님! 하나님의 딸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저의 눈과 귀는 이렇게 활동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무한한 영광과 힘을 내려주십시오.
저의 있는 힘을 다하여 일 하겠습니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시옵소서.
- 경희 -
아! 나혜석. 나는 어찌하여 그녀를 알게 되었는가? 몰랐다면 마음이 이리도 아프지 않았을 것을.....
이제 공연이 코 앞에 다가왔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가 수원청소년문예회관에서 4월 26일과 27일 저녁 7시에 연극으로 각색되어
공연될 예정이다. 나는 각색을 했으므로 비교적 한가하지만 연출가와 배우는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예술적 재능과 미모까지 갖추고 태어난 천재!
자기에게 덮인 인습과 제도의 알을 깨려고 모든 정력을 소진한 여자!
그러나 파리 여행 중 저지른 불륜은 이혼까지 이르고,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던 세상은 멸시하며 등을 돌린다.
이혼과 화재로 그림을 잃은 충격이 겹쳐 화가의 생명인 손이 말을 듣지 않고
전성기 때 천정부지였던 그녀의 그림은 팔리지 않는다.
오호 애재라! 그녀가 만일 파리에서 태어났더라면.....
'살아서는 오르레앙을 구하고 죽어서는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를 흠모하던 여자!
3.1운동으로 투옥되고 창씨개명을 당당히 거부한 여자!
이승만정권과 박정희 정권시절에는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았던 박복한 여자!
덕수궁에 갔었어. 얼마 전이지.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이었던가? 덕수궁 입구에서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 들어갔는데 감회가
새로웠지.
왜냐고? 박수근과 이중섭의 그림이 걸려있는 곳이 내가 문화재관리국에 있을 때 근무했던, 바로 내 사무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울었어. 그곳에는 나혜석의 그림이 한 점도 걸려있지 않았다는 거야. 아, 무슨 말을 하리오. 미술사적으로도 그림의 품격으로도
그림 한 점 정도는 걸릴 줄 알았거든......
그녀는 문학사적으로도 휼륭했어. 나혜석과 동 시대를 살았던 다른 문인과 나혜석의 글을 비교하면, 다른 글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대중을 일방적으로 계몽하려 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나혜석의 글들은 대중 안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공감하는 글이라는 평도 있어.
그 외에도 문학사적으로 할 말이 많아. 그녀는 시, 소설, 희곡, 수필, 산문등 다방면에 많은 작품을 남겼어.
하지만 오늘은 이만 쓸래. 자꾸 마음이 아파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