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이상의 <날개>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럼에도 정독이 힘들었다. 다만 날개의 프롤로그 부분을 꼼꼼히 살펴 읽었다. 그 느낌을 옮기려 한다. 나는 최재서의 날개에 대한 비평을 읽고 그의 비평을 주로 견주어 보려한다.
1. 서언
최재서는 이상의 ‘날개’를 분석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 관찰하는 예술가와 관찰 당하는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구별하야 자기 내부의 인간을 예술가의 입장으로부터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병적일런지 모르나, 인간예지가 아직까지 도달한 최고봉이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최재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상의 ‘날개’를 통해 문단에 주지적 경향이라는 새로운 풍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날개’를 리얼리즘의 심화를 대표한 소설이라고 말하면서 적극 환영한다.
최재서는 이상의 ‘날개’를 비평하면서 저 유명한 ‘날개’ 비평의 지평을 열었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사이 시대가 여러 번 바뀌었으니 다시금 그 비평의 검토를 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2. 이상의 ‘날개’ 비평에 대한 비교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라고 소설은 시작한다.
우리는 다음을 읽어나가기 전에 이 질문과 감정 토로에 집중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 문구는 소설의 전제이며 전체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김윤식은 이를 19세기적 사고에 대한 거부의 포즈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직설적으로 해석하여 독자들을 우롱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둔재들이 알 리 없지. 그래서 나는 유쾌하오.’란 말처럼……. 그 이유는 차차 밝혀보자.
이어서 소설의 프롤로그가 이어진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최재서는 ‘날개’의 주인공을 의사가 진찰한다면 적당한 병명을 붙여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생식물적 존재’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경제생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본능생활에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은 <정신이 은화처럼 맑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작가의 정신상태가 은화처럼 맑은 상태이지 절대 정신분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뒤 이어 나온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란 말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재서는 이상이 ‘날개’란 소설을 통하여 풍자와 위트 야유 기소 과장 패러독스 자조 기타 모든 지적수단을 갖고 가족생활과 금전과 상식과 안일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가정생활- 더욱이 동방예의지국의 그것에 대하여 모독이 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독의 방향에 대해 타자지향적인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상의 ‘날개’는 그것을 넘어 조선의 지식인과 지식인인체 하는 아류들에까지 그 모독을 확장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포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박제가 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한다.>고도 말한다. 박제가 된 천재인 이상은 이 소설을 감정을 배제한 리얼리즘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심화란 최재서의 표현은 이점에서 매우 적확하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란 표현에서 최재서는 박제를 강요당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날개’의 지향점은 시세계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금 날아볼 날이 있을까?’라고 회의를 갖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일제하 지식인의 무력감, 불안, 고통을 넘어서려는 적극적 자세를 본다.
3. 1930년대 사회와 ‘날개’의 연관성
당시의 국제정세와 현실들을 제대로 본 지식인은 적었을 것이다. 1930년대는 많은 인텔리들이 유학에서 돌아온 시기이며 식민지 병리 현상이 뚜렷한 시기이다. 문학은 물론 서양미술,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유학파들이 일본과 유럽 등으로부터 새로운 사조를 배우고 무언가 태동을 꿈꾸는 시기였으나 현실은 일제 치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상을 펼 수가 없었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이상이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 말이 아닌가? 이상은 ‘날개’에서 과거의 인식을 벗어날 것을 말한다. 물론 소설의 기법조차도……. 그가 최초의 모더니즘적 소설을 시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식민지 조선은 잠자고 있었다.
‘날개’란 소설의 배경이 되는 33번지는 자신의 소망이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며 살기 어려웠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상징적인 축도가 아닐런지?
남미의 많은 유명 소설가들이 오랜 식민지 생활과 쿠데다, 군정, 독재 등을 겪으면서 소설에서 환상적 리얼리즘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풍조를 구축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상도 열강의 쟁탈에 나라를 빼앗긴 기성 세대와 그럼에도 정신 못차리는 조선의 식자들을 보며 소설장치를 빌어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식민지적 상황을 33번지라는 독특한 배경을 통하여 그 안에 병리적이고 기형적인 조선의 남자와 여자를 병치시켜 상징적 리얼리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4. 결어
이상의 ‘날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극찬을 하며 해설과 평을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평들의 획일성과 유사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은 ‘날개’의 소설부분을 시작하기 전에 전제와 프롤로그를 쓰면서 ‘위트와 파라독스를 늘어놓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그곳에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여인과의 생활설계’, ‘위조’, ‘19세기 봉쇄’ 등을 말하면서 디테일에 속지 말라고도 말한다. 그 예를 보자.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라고 말하면서 나의 반쪽이 여인의 반쪽만 받아서 서로 마주보며 낄낄거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이상은 그래서 유쾌한 것이다. 한 발만 들여놓고서 디테일로 다들 속여먹는 재미랄까?
최종적으로 그는 ‘여왕봉과 미망인’이란 말을 들먹이면서 (조선의) 여인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미망인이라고 말한다. 미망인이 무슨 말인가? 남편이 없는 과부를 말함이 아닌가? 말하자면 그 일상에 있어서 조선의 (혼이 있는)남자 놈들은 다 죽었다는 말이다. 마치 여왕봉 한 마리에 매어 사는 개성이라고는 없는 일벌처럼……. 얼마나 커다란 모욕인가?
이상은 이 말에 대하여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라고 하여 본심을 담아 ‘규정하였다’는 말로써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이 말이야말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이며 똑똑한 사람이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재서는 이상의 ‘디테일’에 속았다. ‘부디 그대에게 고한다.’는 말의 의미를 놓쳤다. 여왕봉 같은 기생한테 기생하여 사는 식민지 조선의 인텔리들! 최재서마저 둔재가 되었다.
이상은 한 발을 빼놓고서 지금도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라고 질문과 감정토로를 통하여 우리 둔재들을 모욕하며 낄낄거리고 있다. <‘디테일’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에게 고하는 것이니…….> 우리 모두가 ‘디테일’에 속아서야 되겠는가?
*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너무 독선적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갖는다. 이상의 <날개>와 최재서의 비평을 한 번 읽어보고 너무 즉흥적으로 쓴 것 같다. 추후 자세히 정독하는 기회를 갖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