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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쥬띠 2015. 9. 7. 09:33

   나는 ‘나혜석 거리’가 있는 수원에 살고 있다. 나는 우연치 않게 나혜석을 알게 되었고 이제 나는 나혜석에 빠져 헤매고 있는 중이다. 왜냐면 나는 2년째 나혜석에 관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나혜석은 편견의 희생자이고 나는 그 편견을 향해 글이란 총알을 장전해 아무도 몰래 암살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내가 나혜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이다. 수원에서 오랜 연극활동을 한 극단‘성’의 K대표가 2013년에 나혜석의 희곡 <파리의 그 여자>의 공연에 초대한 것이다. 그는 매년 나혜석의 날에 공연을 해왔고 다음 해인 2014년 연초에 나혜석의 소설 <경희>를 공연하려고 하니 각색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나는 각색을 위해 나혜석의 소설 <경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이렇게 멋진 글을 쓴 여성이 있었다니? 그렇게 각색한 나혜석의 <경희>는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고 이후에도 두 차례 공연이 이어졌다.


    작년 봄, 서울대 명예교수인 엄태정 교수님이 예술원 회원이 되셨고 딸에게 초대장을 주셔서 가족이 [대한민국예술원 개원60년- 어제와 오늘]이라는 전시회가 열리는 경복궁에 갔다. 거기에는 57명의 작품 79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혜석이 예술원 회원이 아니니 그녀의 작품이 없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어리석게도 혹시나 하고 나혜석의 작품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그녀의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곳 경복궁에서 [한국근대회화 100선]이란 전시회가 또 열려서 ‘혹시나’ 하고 보러갔는데 ‘역시나’였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작품 중에도 그녀의 작품이 한 점도 없다니 그것은 충격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중.고등학교의 미술교과서에는 140여점의 미술작품이 소개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나혜석의 그림은 찾을 길이 없다. 그녀는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면서 조선미전에 9회에 걸쳐 참여해서 18점의 작품이 입선과 특선을 하고, 최초의 서울 전시회를 개최해서 당시로서는 인산인해라 할 정도로 획기적인 성황을 누렸음에도 말이다.

    나혜석은 당대에 뛰어난 화가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불리는 고희동도 예술원 개원 60년 회원전에 <하경산수>란 동양화를 선보일 정도로 당시의 많은 화가가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를 탓하면서 서양화의 붓을 꺾었어도 그녀는 오로지 서양화가로서 초기 전업작가의 험난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혜석에 대한 대접을 보며 그림에 무지한 일개의 문외한이 분노마저 느낀다.


    이것은 음모다. 그 당시 미술계의 모두가 공모하고 누군가가 낙인을 찍고 대중이 추인한 음모다. 내가 암살을 계획한 것은 그러한 연유다.

<나이토 치즈코內藤千珠子(1973~)>가 쓴 책에 <암살이라는 스캔들>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 그녀는 말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역사적 사건을 스캔들로 만드는 미디어의 언어 속에는 독자들의 욕망과 두려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정형화된 구조가 들어있다. 틀에 박힌 이야기형태의 논리에 침식당하고 잊혀진 목소리를 줍기 위해 지금 당장, 이야기를 암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말살과 한일합병, 명성황후 시해, 동남아 침략, 전쟁 등 학살과 침략 등의 일을 벌일 때 먼저 정형화된 이야기(전염병, 열성인자, 여성비하, 후진인종)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사례를 들어 설파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일합방 시에 일본의 언론은 ‘조선인이 기뻐하고’, ‘천황폐하께서 친부모보다도 더 자애로운 마음으로’ 등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림으로써 일본인의 죄의식을 말소하고 저항분자의 처단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는 살의를 가진 미디어뿐이 아니라 작가, 오피니언 리더 등 모두가 합세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을 대거 처형할 때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 <그 후>를 이 글의 작가는 예로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나쁜 짓의 선봉에 서있는 이야기를 암살해야 한다는 그녀의 논리는 명쾌하다.


    이야기가 너무 딱딱하게 되었다. 나는 나혜석을 쓰기위해 작년 여름 수덕사를 찾았다. 수덕사 입구에 ‘덕숭산 수덕사’란 현판이 보이고 바로 옆에 있는 찻집에는 비구니 두 분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나혜석이 3년간 머물었다는 수덕여관 쪽으로 방향을 트니 대문에는 ‘공사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수덕여관’이라고 새로 써진 현판이 아름다웠다. 마당을 돌아가는데 배롱나무에 꽃들이 흐드러지고 있고, 정문 입구 쪽 소나무 두 세 그루가 기상이 넘쳐 범상치 않았다. 여관에는 이응로 화백에 대한 안내문과 그가 머물었던 여관방이 표기되어 있었지만, 나혜석의 자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숲을 스치며 들려오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만이 텅 빈 여관마당을 휘돌았다.

발길을 돌려 환희대에 오르니 ‘김일엽 선사상의 세계화’란 프랑카드가 법당입구에 걸려있고, 막 강연이 끝나선지 주지스님과 강연자 등이 법당 아래 요사채로 걸어간다. 커다란 프랑카드에는 ‘주최, 김일엽 문화재단/ 후원, 일엽문도회’라고 써있었다. ‘아! 김일엽 문화재단이 있었구나. <수덕사의 여승>이란 그녀를 기리는 노래도 있고…….’ 환희대를 돌아서 나오는데 살아서도 수덕사란 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서도 수덕여관에 흔적조차 없는 나혜석이 안쓰러워 자못 슬펐다.

    나오는 도중에 낯이 익은 분이 있어 다가가니 SDU에서 강의를 하시던 ‘방민호’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은 김일엽에 대한 강연회에 참석하셨다고 말했다. 내가 그분을 특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나라 여성 1세대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나혜석을 얘기했고, 그분의 외할아버지인 고의화님이 나혜석의 그림 3점을 샀던 일화를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얘기를 하다 보니 옆에서 서계시던 분이 방민호 교수님의 어머님이셨는데 ‘아! 그분이 저의 아버님이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자식이 너무 보고파서 서울로 올라갈 여비를 마련하러 그림 3점을 보따리에 넣고 아픈 몸을 끌고 수덕여관을 내려가던 초라한 여인이 자꾸 떠올랐다. 그 그림 속에는 그녀의 최후의 작품인 ‘수덕사’도 들어있었다는데……. 교수님의 어머님께서는 그 당시 아버님이 면서기였었는데 봉급 두달 분인 18원이라는 돈을 주고 그림을 샀었다고 말씀하셨다.

 

    언젠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일요일이었다. USB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혜석에 대해 쓴 자료가 다 날라 가서 그간 실의에 빠졌었는데, 심란하던 마음을 다스려 다시 나혜석에 매달려 초고를 썼다. 일요일 낮에 그 원고를 아내에게 들이밀며 ‘한 번 읽어 줘.’라고 했더니 아내가 진지한 얼굴로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조용히 얘기하자고 했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다다익선>과 설치미술, 조각, 회화를 감상하고 근처의 지붕이 달린 야외 벤치에 앉았다. 내 원고를 받아든 아내가 말했다. ‘여보! 세상 사람들이 나혜석을 폄하하고 욕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더구나 평론가들이야 더욱 그렇죠. 당신은 하고 많은 인물 중에서 나혜석에 빠져서 오늘 아침에도 ‘나혜석!’ 점심에도 ‘나혜석!’하니 내가 견디다 못해 이곳에서 얘기하자고 한 거예요. 작년에 나혜석을 쓴다고 같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방문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혜석 타령이라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초라한 나의 원고는 들이치는 비에 축축해지고……. 아!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든지…….

 

    그간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면전에서 나혜석을 욕하고 폄하했다. 그럴 때마다 ‘나혜석이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가정을 해본다. ‘조르주 상드’, ‘까미유 끌로델’, ‘프리다 칼로’ 등 많은 여성작가들이 떠오른다. 나는 글을 쓰면서 가끔 울었다. 자의든 타의든 나혜석을 불행으로 이끌었던 나혜석의 남자들 - 최승구, 이광수, 최린, 김우영-, 그리고 나혜석을 흠모했던 ‘이상’에 이르기까지……. 그 남자들 중에 요절한 최승구와 이상을 뺀 세 사람- 이광수, 최린, 김우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두 반민특위에 섰다.

    올 한 해가 가기 전에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쓸 게 많아 걱정이다. 능력부족이 더욱 안타깝다. 하지만 암살이 성공하려면 인내를 가지고 쓰고 신중히 총구를 겨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