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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소식에 부쳐

쥬띠 2015. 10. 10. 10:24

[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에 부쳐 ]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을 들으면 나는 또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수상소식에 환호를 하고 긍지를 느끼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중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 때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인 중국의 소설가 모엔(莫言.57)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는 그 상이 바로 옆 나라에서 타게 됐다니 부러움에 앞서 우리의 현실이 가슴 아프다.

   '나는 문학이다'라고 말한 카프카의 글에 '법 앞에서'란 글이 있다. '한 사내가 법 앞을 문지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늙어 죽는다'는 얘기다. 모엔은 오로지 글로 승부하겠다고 이름마저 莫言(말 안함)이라고 지었다. 그것이 검열의 나라 중국에서 문을 통과하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많은 문이 있고 문마다 문지기들이 버티고 있다. 세상에는 두개의 문이 있고 모두 넓고 확실해 보이는 길로 모여든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는 모두가 외면한다. 아! 가지 않는 길!

   문학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우선 '등단의 문'이 버티고 있다. 등단의 문 앞에 선 그들의 열정이야말로 모엔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열심히 모범답안을 찾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아! 찰나의 불꽃!

   그리고 '안보의 문'이 있다. 천안함에 대해서는 이미 정답이 나와 있다. 짧은 조사기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어뢰를 쏘고 공해상으로 도망갔다'는 조사단의 전지적 시점의 발표는 100% 법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 그래서 누구도 더 이상의 조사나 가정을 허용치 않는다. 문지기는 힘이 세므로 더 이상의 왈가왈부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종북주의자가 된다. 아! 완벽 안보!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돈으로 상징되는 '자본 제일주의의 문'이 있고, 조찬기도회 등으로 상징되는 '종교의 문', 편견으로 얼룩진 '오리엔탈리즘(지역차별, 학연 등)의 문' '민간인 사찰의 문', '등급 검열의 문'……. 

   언젠가 '이 어둡고 각박한 세상에서'란 시를 올렸는데 운영자가 황급히 삭제했다. 이와 같이 문지기는 도처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 남미와 동구권과 또 중국의 경우에도 모두 이 문을 통과하고 진실의 문에 다다른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문학은 진실이고 정의인데……. 노벨문학상 앞에 놓인 무수한 문들!』

 

나는 세월호 사고, 신경숙 표절 등 크고 작은 저간의 일에 대해 그때마다 글을 인터넷에 발표했다. 때론 시로, 소설로, 수필로. 하지만 많은 경우 삭제와 비토를 당해야 했다. 얼마 전에 나는 창비와 나의 원고 <강착통>을 돌려달라는 문제로 실랑이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다섯 번이나 돌려주겠다던 약속과는 달리 기어코 그 원고를 돌려주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담당자의 말뿐이었다. <강착통>은 ‘강한 자들의 착취를 돕는 통제회사’의 약칭이었고, USB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원고가 꼭 필요해서 5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전화로 다섯 차례나 부탁하고 그때마다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슬픔, 사랑, 이별, 그리움 등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해 의심해 볼 때가 있다. 그들은 그 단어들을 너무 피상적으로 쉽고 아름답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또 많은 유명한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자한다.

굳이 이런 글을 쓰고 싶지 않지만 손광성님의 달팽이란 글 중에서 <달팽이는 이빨도 없다> 라는 말에는 의문이 있다. 달팽이도 이빨이 있어서 잎이나 이끼 등을 먹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양식하는 사람들은 상추, 오이, 호박, 고구마, 두부까지 먹이고, 껍질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계란껍질도 먹인다고 한다. 아마 달팽이 끼리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는 싸움도 할 거고, 번식력도 대단해서 두 달이 지나면 한 마리가 300마리로 는다고 한다. 인간이 아니라 달팽이의 입장에서 자세히 보면 이러한 예가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다른 시각(달팽이가 강하다)도 가져야 될 거라고 본다. 그분의 글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배우는 입장에서 말해 본 것이다.

언젠가 보르헤스의 글들을 해설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해설이 더 어려웠다. 각주가 많아서 가뜩이나 어려운데 해설서에는 더 많은 다른 학자의 글과 평이 섞여 도대체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웠다. 해설이 쉬워야 하지 않는가? 나는 보르헤스를 읽고 해설서 없이 10여 편의 독후감을 써 두었다.  지금도 해설서가 더 어려우면 짜증이 나고 화까지 난다.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하는 TV강의를 본 적이 있다. 강사는 도덕경의 첫 구절인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를 해설하면서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라고 말하는 순간, 그 도는 늘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뱅뱅 돌아 어지러웠다. 강의 첫머리에 의문이 들자 그 다음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예전에 누구의 부탁으로 뜬금없이 호주의 관세제도 번역을 할 일이 있었는데 첫 구절부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다. 원문은 생각나지 않지만 결론은 ‘~ 이 규정은 ~에 관한 통관규정이라고 칭한다.’였다. 그 후에 보니 모든 법령은 ‘이 법은 ~라고 칭한다.’로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도를 도라고 칭할 수 있지만 꼭 도라고 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름 결론지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도를 설파한 노자는 그 명칭을 도라고 정하면서 변경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쓸 때 소설의 제목을 <뼈와 살이 익는 밤>이란 가제로 정해 두었다가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바꾸듯이 말이다. 화가나 조각가는 이름 붙이는 일이 무척 어려웠나 보다. 유독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무제>란 제목이 많으니 말이다. 노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천년도 훨씬 전에 20대의 왕필이라는 학자의 해설을 금과옥조처럼 받들 사람은 받든다고 쳐도 추호의 의심도 않으면 곤란하지 않는가?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벨라루스의 기자출신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7)”에게 돌아갔다. 그녀도 검열과 숱한 출판정지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최근의 노벨문학상은 동구, 남미 등 역경의 문을 통과한 제 3세계의 작가에게 주어진다. 고은 선생이 노벨상 후보에 유력하게 오른 것도 그 분의  금기의 문을 통과하려는 노력도 일조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장 그르니에의 수필집인 <섬>이란 책을 펼쳐놓고 알베르 까뮈가 쓴 서문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 속에, 혹은 스승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정확하면서도 꿈 꾸는 듯한 저 가벼운 언어는 음악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

 

내쳐 번역을 한 김화영의 글도 싣는다.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 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

 

멋진 것 같아요, 좋은 것 같아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펌글이 난무하는 세대에서, 문창과에서 공부하는 나로서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 살아도 나는 외딴 섬에 살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나의 가족은 문학과 영화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떤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이는 모두 나의 침묵으로 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