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없는 인생 3 ]
몇 년 전의 일이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1월의 소한 추위에 맞추어 등산을 계획했다. 그때 생각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힘든 일을 해보자.’란 단순하고 철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등산이었고 나는 낡은 배낭에 겨울옷을 잔뜩 껴입고 지리산을 올랐다. 나름 준비한답시고 떠나기 전날에 인터넷을 검색해 산장에 예약을 해두고, 현장에 가면 버스로 성삼재까지 가고 그곳에서 컵라면을 사먹고…….
구례에 내리는 순간, 차질이 생겼다. 동절기에는 버스운행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 등산을 다니지 않으니 등산화 하나 외에는 모든 것이 평상복이었으니 겨울 등산객의 모습이 영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친 김에 택시타고 성삼재까지 갔고 산장에 들어서니 등산객이라고는 한두 명이라서 예약자체가 의미가 없었고 그나마 폭설에 등산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사람들이었다.
산장 입구에서 겨울철 수질보호를 위해 컵라면을 팔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는 순간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 쵸코파이와 귤을 사서 먹고 첫날밤을 산장에서 잤다. 이튼 날 새벽에 밖에 나오니 발자국마저 희미했다. 그래도 등산객도 한두 명 멀리 보였으므로 쵸코파이를 먹고 힘차게 출발했다. 그런데 각반을 하지 않아 등산화 사이로 눈이 들어가고 길이 희미해 길옆의 낭떨어지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눈이 많이 쌓여 다치지는 않았으나 다시 길로 오르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지치고 한두 명 보이던 등산객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배고프면 쵸코파이를 먹고, 힘을 비축하기 위해 쵸코파이를 또 먹고 가다 보니 자꾸 지체되고, 산장에서 잠시 쉬고 다음 산장으로 가려니 산악감시원이 입산통제를 했다. 오후 3시 이후에는 조난사고 방지를 위해 입산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쵸코파이를 먹고 이른 시각에 산장에서 잠을 자고 이튼 날 새벽에 길을 떠났다.
2박 3일의 여유 있는 일정을 세우고 떠난 길인데 예정보다 늦어지기 시작해서 초조한 마음에 오후 3시가 넘었고 산악 감시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등산을 계속했다. 쵸코파이를 먹으면서…….
이정표에 다음 산장까지 1천 미터의 거리가 남았다는 것은 눈 속에서 끝도 없이 가야하는 거리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더구나 고갯길이었고 찬바람은 휘몰아치고 등산화 사이로 들어간 눈으로 발은 얼었고 손이 곱아서 그 눈을 꺼낼 수도 없고 급기야는 해가 지고 달이 떴다.
구구절절한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언덕을 넘다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잠시 앉았다. 그리고 오돌오돌 떨며 통곡을 시작했다. 그 통곡은 나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불쌍한 세상을 향한 통곡이었다. 탐욕에 찌든 세상, 돈에 눌린 세상, 휴머니즘을 잃은 더럽고 불쌍한 세상을 위해서 통곡했다. 얼마나 통곡하고 싶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완벽한 장소이고 등산객 하나 없는 얼마나 완벽한 시간인가! 세상에서는 통곡할 장소와 시간이 없다. 그런데 이곳 지리산 산골짜기 언덕에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마음껏 통곡할 수가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때의 저 달은 내 맘을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산장에서 쵸코파이를 먹고 다음 날, 지친 몸을 끌고 천황봉에 올랐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쵸코파이를 먹지 않는다. 가끔 쵸코파이를 주는 사람에게 거절하면 그 이유를 묻는다. 구구절절 얘기하기가 뭣해서 그냥 웃는다.
올해로 환갑이다. 나는 환갑여행을 지리산으로 정했다. 가장 추운 날을 택했듯이 가장 더운 날을 택해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내는 같이 가려고 하겠지만 나는 홀로 갈 것이다. 온몸이 지치고 땀으로 온통 젖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기쁘다. 여름의 지리산이라 사람들이 많아 통곡할 장소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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