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급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침에 교대하는 S반장이 교대하면서,
"105동 옥상에 팽창탱크가 고장인가 봐요. 엊 저녁에 난방이 안된다고 민원이 많았거든요. Y주임이 아까
올라 갔어요."하고 말했다.
"씨팔, 중요할 때는 꼭 혼자가고......... " 엘리베이터안에서 궁시렁 거리는 내 모습이 한심스럽다.
"나이 오십이 넘어 아파트 초짜에 제일 쫄짜라니,,,, "
옥상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였다. 서쪽으로 넓은 벌이 한없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공군부대의 골프장이 숲에
가려 있다. 부대의 관사 앞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넓은 단지의 북쪽 끝으로 부터 성냥갑같은 아파트 건물이
자꾸 자라났다. 흰구름이 떠도는 하늘가로 '타워 크레인'들이 무심하게 걸려 있다. 남으로는 비상활주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고 벌판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우울한 마음을 확 날려 준다.
삐걱거리는 철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려진 철문안에서 직부등의 누런
불빛이 새어 나온다. Y주임과 소장이 정답게 붙어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요. 여기 이 배관이 팽창관이라는 건데요. 이 놈이 여기로 쭉 내려가서 기계실로 가는거예요." 불빛에 어린
그의 붉은 이마가 번들거렸다.
"그럼 이 배관은 뭐예요?" 소장이 가늘고 하얀 손을 들어 옆 배관을 가리킨다.
"아! 그거요. 그것은 바이패스관이라는 건데 배관에 문제가 생기거나 수리할 때에 여기를 이렇게 잠그고 여기를
이렇게 열면 되지요." 그는 둘째 손가락이 잘려서 뭉툭해진 손을 연신 이리 저리로 휘저으며 설명을 해댄다.
"그러면 저 쪽 관은 요? "
소장은 계속 꼬치 꼬치 캐 묻는다. 여자라고 무시할까봐 배울 수 있는 한 배워 놓자는 심사다. 기전기사에게
많이도 시달렸나 보다. 그들의 대화는 다정하게 계속 되고, Y주임은 파이프 렌치 두 개로 연신 밸브를 풀고 있다.
"이것 보세요. 이게 감압밸브란 겁니다." 그가 자랑스럽게 밸브를 치켜올린다.
"보세요. 여기가 이렇게 고장난거요. 다 낡았쟎아요."
"어디요?" 소장과 Y주임의 얼굴이 서로 잠시 엉킨다.
"Y주임님. 지금 압력게이지가 2키로 인데 적절한가요?" 틈을 보아 나도 한마디 했다.
"자, 소장님 이제 내려 가시죠." 그가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간다.
철문이 닫히자 낙엽들이 화들짝 놀라 진저리를 친다. 아파트 옥상의 지붕 너머로 마지막을 고하는 가을 단풍이
몹시도 곱다. 들 녘에는 한 낯의 햇살이 그득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오니 문이 닫히려 한다. 소리를 질러 겨우
올라탔다. '사람이 뻔히 타려는 것을 알면서 ....' 참 싸가지가 없다.
"저, 이것 좀 볼께요,"하며 Y주임의 손에 든 밸브를 낚아챘다. 놋쇠로 된듯이 보이는 밸브에는 "AUTOMATIC
PRESSURE REDUCING VALVE'라 쓰여 있었다.
"자동감압밸브라고 쓰여 있네요."라고 말하자,
"이리 줘요." Y주임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둘러 뺏는다.
"이거 국산이예요?" 다시 소장이 묻는다.
"중국산일거예요." 둘이 밸브를 들고 얼굴을 나란히 하고 글씨를 찾는다. 마치 '디카'를 찍는 연인들 처럼...
둘의 대화를 뒤로 하고 밖으로 서둘러 나오자 하늘을 올려 봤다. 가을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렀다. 메타쉐콰이어,
상록수, 단풍나무들이 녹색과 빨강의 조화를 이루고, 활엽수들은 잎을 다 떨구고 조용하다. 산수유 열매가 새빨갛게
익어서 가슴시리게 예쁘다.
사무실의 맨 앞 자리에 앉아 1회용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은 행복하다. 따스한 커피 내음과 함께 나도
어디론가 스미어 간다. 과거의 추억 속으로.... 풍경 속으로, 색깔 속으로, 촉감 속으로,,,,
옆에는 경리가, 뒤에는 Y주임과 과장이, 그리고 한참 뒤에는 소장이 칸막이를 가려놓고 성주처럼 버티고 있다.
"요즘은 제법 바쁘네요.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기가 힘드는데..." 적막이 부담스러워 새침하게 앉아 있는 경리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그동안 많이 놀았쟎아요." 그녀가 아무런 표정없이 말한다.
입주민인듯한 사람이 들어 온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물었으나 그는 대꾸도 없이 안으로 안으로 들어 간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죠?" 소장이 묻는다. 비로소 그가 입을 연다.
기전실로 내려왔다. '웅'하고 변압기 우는 소리와 "쉬잇"하며 펌프도는 소리가 정겹다. 비록 지하공간이지만 올 곳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처음에는 기전실이 낯설고 무섭기 까지 하더니 삼개월이 넘어가니 익숙해졌다. 이곳 기전실은
비무장지대다. 땅위로 올라가면 온갖 적의, 무시, 위선, 폭압과 음모들로 무장된 세계가 도사리고 있다.
핸드폰이 울린다.
"형선? 어쩐 일이야? 아직도 인천인가?"
"아니, 출항했어. 옥계로 가고 있지. 스트레쓰 쌓여서 죽겠네. 식당에 갔더니 '1기사'하고 선장이 둘이서만 얘기하는거야.
옆에 사람이 있는데도... 내가 얘기하면 대꾸도 없고, 사람 몇 명 된다고 ..."
"야! 형선아.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그럼 너도 말하지 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좁은 배안에서 어떻게 사냐?"
"그러게... 둘이서 은근히 왕따시킨다니까. 은근히 부아도 나고...." 그의 한 숨 소리가 크게 들린다.
"야, 그러면 밥을 조금 일찍 먹든지 아니면 늦게 먹든지 해서 서로 마주치지 마, 그러면 될 거 아냐?"
"글쎄,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수 없다니? 그곳에서 그럴 수 없으면 육지에서도 적응 못해, 세상이 만만하지 안쟎어?"
"갑판장도 말이 없고 선장한테만 잘 보일려고 하고, 그리고 선장이 젊어, 싸가지도 없고, 아흐...."
갑자기 짜증이 밀려 왔다.
""형선아! 이 나이에 뭐가 두렵냐? 승진을 할래, 아니면 강등이 무섭냐. 막말로 갈아타면 되쟎어. 기술 있겠다.
30년이나 탔으면서... 나는 지금 3개월짜리 초짜인데..." 나는 바쁘다는 핑게로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해가 졌다. 모두들 퇴근하고 이제 나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시간이다. TV를 켰다. 교수들이 나와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답게 이제는 세계를 향한 우리의 책무에도 눈감아서는 안된다고 앞다퉈 말한다.
나는 이제 비무장지대에 갇혀 세상을 도모한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 밖에는 무장지대다. 온갖 병장기들로 철거덕
거린다. 입을 가진 그들은 무서운 자들이다. 나는 무장지대를 넘어 외계에 무전을 친다. '정의란 무엇일까?'란 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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