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이 깊다. 멀리 청계산과 백운산의 능선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산 아래로는 백운호수가 인근 카페의 불빛을 끌어안고 밤을 새우고 있다. 맞은 편 모락산 산허리에 인근 동네와는 외따로 지어진 허름한 비닐하우스에 불빛 하나만이 초롱하다. 가을밤의 냉기가 산 아래 계곡을 스치며 호수를 향하여 가라앉고 있다. 가끔 적막을 깨는 소리가 창문 틈으로 스미어 나온다. 그 소리는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집안은 작은 거실과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거실과 방의 한쪽에는 풀지 못한 살림 짐이 가득 쌓여있다. 방안에서 지쳐 보이는 남자가 한숨을 쉰다.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그 좋은 직장 때려 치고 꼴좋네. 왜 한숨은 쉬고 그래요? 재수대가리 없게. 사업 잘해 가지고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준다며? 아이고! 고작 월세 방에 저 산 같은 짐들은 앞으로는 펴보지도 못하겠네. 아이고! 내 팔자야!” 여자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하여 악을 쓰다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방바닥을 손으로 내려친다.
“애들은 커서 돈들 일만 남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애들 학원이고 레슨이고 다 집어치고 내일부터 일 다닐 테니까, 당신은 당장 도둑질이라도 해 와요! 손가락 빨 수만은 없잖아요. 그리고 늘 친구, 친구하더니 그렇게 많던 친구들은 뒀다 어디 쓰려우? 친구 불알을 잡고 늘어져서라도 당장 취직이라도 하세요! 아니면 돈을 꾸어오든지!”
“여보! 제발 이제 그만하고 잠 좀 잡시다. 밤마다 이게 무슨 난리요. 나에게 시간을 좀 줘.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여자가 불알이 뭐야! 애들 듣는데?” 남자는 한쪽 구석에서 눈을 감으려고 애쓰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큰 애인 듯싶은 여자아이는 귀를 막고 있다.
“툭하면 그 놈의 시간! 언제까지 시간타령을 할거야? 지금 불알이 문제요? 더 해볼까? 퇴직금 다 날리고, 집마저 담보로 날린 당신이 그런 말 할 염치가 있어요?” 급기야 여자는 울어 버린다.
“당장 이혼해!! 위자료 달라고! 그 많은 돈을 난 한 푼도 만져보지 못했어. 왜 남들은 파산신청도 잽싸게 하고 돈도 잘 빼돌리던데, 납품대금과 직원 봉급 탈탈 털어 다 주고 우리는 뭐냐구? 그래도 당신은 사장소리도 듣고 신나게 돈을 써보기라도 했잖아? 난 너무 억울해! 그리고 이제 가난은 생각만 해도 지긋 지긋해! 아까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그린벨트 담당공무원이 와서 불법건물이라고 당장 철거하래요. 저기 담벼락에 써진 빨간 스프레이 글씨가 당신 눈에는 안 보여요?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새빨간 낙인을 찍냐고?”
“여보,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해! 제발 잠 좀 자자. 내일은 친구라도 만나 볼 거야. 무슨 수가 나겠지.”
“수는 무슨 수!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요? 당신 얘기는 안 들어봐도 뻔하잖 아요, ‘나는 잘못이 없다’ 그 말 아네요?”
“야! 나도 말 좀 하자, 너만 입이고 나는 주둥이냐?”
“그걸 이제 알았어요? 당신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사내의 눈에 독기가 잠시 서리다가 여자의 부리를 닮은 단단한 코를 보자 이내 사라진다.
‘지가 무슨 크레오파트라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찬바람이 잠옷 바람의 얇은 옷에 사정없이 파고든다. 사내는 담배 하나를 빼어 물려다 도로 넣는다. 꾸부정한 허리를 더욱 굽히며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뱉는다.
‘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구나. 주인 놈은 이곳이 그린벨트에 지은 불법건물이란 사실을 전혀 말해주지 않았어. 왜 이리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지? 저 산더미 같은 짐을 가지고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돈 한 푼 남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전혀 방법을 모르겠어. 다음 달 말까지 철거하라니? 개 같은 놈들아! 스프레이로 낙서를 할 바엔 차라리 배를 째라, 배를 째! UN에 난민신청을 할까? 오! 개 같은 내 인생!’ 사내는 불과 1년 전의 자기 모습이 떠오르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웃어 버린다.
고개를 들어 쳐다 본 하늘의 별빛은 흐릿하다. 목이 뻣뻣하고 눈에 안개 같은 것이 어려 어질하다. 그 때 하늘의 별들이 사내에게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비자 다시 올라가 흐릿한 별무리가 되었다가 이번에는 나풀대는 나비가 되어 동시에 날아왔다. 나비들은 움막 주위까지 내려와 하늘대다가 갑자기 주둥이들로 변했다. 주둥이들은 한 목소리로
‘모든 잘못은 너 때문이야!’라고 일제히 나불대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팔을 휘젓다가 현기증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2
이태원 근처, 노자와 친구 셋이 통닭을 파는 호프집을 지나 룸싸롱으로 들어간다. 노자는 마지못해 따라간다. 그들은 과천청사 근처서 저녁을 먹고 서로 2차를 사겠다며 노자를 끌고 왔다.
“호프집도 좋은데…….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친구들은 노자의 말을 무시하고 잡아끈다. 화려한 불빛에 노자는 곤혹스럽고 자꾸 눈앞이 어찔해진다.
“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맥주는 무슨 맥주, 그리고 너, 닭이라면 죽도록 싫어하잖아? 마누라가 닭띠라고 닭고기 싫어하는 인간은 처음 봤다. 너, 마누라가 그렇게 좋냐?” 그가 노자를 빤히 쳐다본다. 노자는 네온 불빛에 그의 대머리가 붉었다 파랗다 하면서 변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의 의아스런 눈을 피해서 노자는 눈을 내리뜬 채, 흰 셔츠 위에 빨간 넥타이가 자신만만하게 튀어 오른 배에 얹혀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것을 다시 멍하니 바라본다.
“야, 한권아! 너 잘 나가나 보다? 장차 훌륭한 모피아가 되겠다. 넥타이가 근사한데?”
“야, 정신 차려 소주 몇 잔에 벌써 취했냐? 천하의 노자도 한 물 갔네. 섭섭한데! 호프라니? 너 우리를 그렇게 인색한 놈으로 보냐? 그리고 모피아라니? 살짝 열 받네.” 노자는 못들은 척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키가 크다. 노자는 내려뜬 눈을 한참 올려 그를 본다.
“어쭈, 넌 뭔데? 전봇댈세 그려. 회계사 양반이군. 그래, 홍철아! 한권이가 많이 도와주나보지?”
“얘가 사업에 망하더니 완전히 삐딱선을 탔군. 모범공무원였던 거 맞아?”
“노자야, 잔말 말고 무조건 우리만 따라와.” 옆에 섰던 친구가 노자를 끌고 룸싸롱으로 들어간다.
“이건 누구야? 아! 고용노동부장관 나리? 요즘 너네 부처 잘 나가더구만. 잘 나가면 좋지, 좋고말고. 나도 좀 취직시켜 주라.”
룸싸롱 안에서 러시아 무희가 화려한 불빛 아래서 누드로 춤을 추고 있다.
“오늘은 모든 걸 잊고 신나게 마시는 거야. 야! 저 여자 몸매 죽인다. 노자, 어때?” 고용노동부장관이라 불리는 친구가 소리친다. 웨이터가 룸에 술을 가져와 한상을 차려놓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다. 모두들 술을 마구 마신다. 아가씨 네 명이 들어온다. 모두 쭉쭉빵빵이다. 한권이가 노자의 어깨를 툭 치며,
“야, 노자! 지금부터 골치 아픈 얘기는 집어치우고 맘껏 마셔! 우리가 모두 책임질게.”
“건배!” 노자를 뺀 모두들 한 목소리다. 노자는 마지못해 술잔을 든다.
“건배라……, 무엇을 위해서? 날 놀리나? 그러니까 내가 챔피언이라도 된 것 같군. 잘 노네. 나보고 뭘 어쩌라고?” 노자는 중얼대며 계속 무슨 말을 하려하나 음악이 시끄러워 소리가 끊긴다.
“야! 니들, 나 부탁이 있는데…….”
“뭐라고? 잘 안 들려.”
“부/탁/이/ 있/다/고!”
“뭐/라/고? 잘/ 안/ 들/려!”
“……. 나/, 갈/게.”
“뭐?/ 벌/써? 2차 안 갈 거야?”
“2차? 창중스럽구만.”
“뭐/라/고?”
“창/중/스/럽/다/고!”
“창중? 그게 뭔데?”
“창/피/스/럽/다/고? 부/끄/러/워/ 마. 우/리/는/ 다/ 이/해/해! 살다보면 너처럼 거지꼴이 될 수도 있지.”
노자가 밖으로 나오자 친구들은 남은 술과 여자들을 아쉽게 쳐다보며 마지못해 밖으로 따라 나온다.
“지금의 내 심정을 누가 알리요. 자정이 넘었어! 집이 의왕인데……, 큰일 났다!”
“택시!” 술집 밖, 도로에서 친구들이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다. 술이 떡이 된 노자가 택시를 탄다. 친구들은 각자 온몸을 비틀어서 굳바이 몸 인사를 하고는 일제히 뒤돌아선다.
노자는 택시 안에서 주머니를 뒤진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다. 슬프다, 왜 그런지는 생각조차 안 된다. 그저 슬플 뿐이다. 노자는 아내의 주둥이가 가득 차있는 것만 같은 하늘을 보며 탄식한다. 택시는 물넘이 언덕을 지나 울긋불긋 백운호수를 끼고 올라가다 능안마을로 방향을 튼다. 꼬불꼬불 저승길 같다. 모락산 꼭대기에서 저승사자가 마중 나올 것만 같다.
“얼씨구? 잘 한다. 그 좋은 직장 때려 치고 사업 망했다고 유세떠는 거유? 내일 쓸 돈도 없는데 택시비가 5만원이라니! 더 이상 못살아.” 아내가 술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편을 경멸스럽게 쏘아본다. 아이들이 차례로 잠에서 깬다. 거실에 나와서 술이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노려본다.
“나는 잘못이 없어! IMF 탓이라고! 그리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사업 했어?” 노자는 먼저 악을 써본다. 아이들이 귀를 막는다.
“뭐 잘한 게 있다고 큰 소리야! 얘들아! 방문 닫아! 동네창피하다.” 아이들이 잽 싸게 일어나 노자가 열어 둔 문을 닫는다. 노자는 일어서려다 오바이트를 하고 쓰러진다.
“꼴좋다. 애들 앞에서, 뭐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지금 당신의 모습이 어떤 지 알아. 한 마리의 버러지 같단 말이야. 차라리 나가 뒈져!! 왜, 남들처럼 돈 한 푼도 안 빼돌렸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날이 밝았다. 아이들은 해롱해롱 누워있는 아빠를 무시하고 엄마에게만 인사하 고 학교에 간다. 아내도 출근을 위해 나간다. 노자는 비실비실 일어나 혼자 밥을 먹은 후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한다.
“나가 뒈지라고?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노자는 그릇을 내팽개친다.
“아! 내가 새파랗게 젊던 날에 병아리 같던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저 거대한 부리와 단단한 발톱에 쪼이고 채이지 않았을 텐데……. 삵괭이 같은 자식새끼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보지 않았을 텐데……. 오! 철밥통을 팽개치고 사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IMF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노자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3
출정1
정부청사 근처의 식당, 점심 때, 노자와 한권이 앉아서 삼계탕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소주가 한 병 보인다. 한권의 대머리에서 여전히 빛이 나고 있다. 흰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가 날름거린다.
“야, 노자야! 너도 이집 알지? 삼계탕으로 정말 유명하지. 언제 먹어도 맛있어.”
“알다마다, 우리 가끔 왔지. 요즘 산하기관에 자리는 많아? 삼계탕 잘 먹네. 내 것도 마저 먹지 그래? 나는 속이 안 좋아서.”
“자리는 많지. 나도 몇 년 후에는 산하기관으로 낙하할거야. 나이 들면 눈치가 보여서. 그나저나 어쩌다 망했니? 잘 좀 하지.” 그가 삼계탕을 끌어다 마저 먹 는다.
“잘 좀 하라니?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나 열심히 했어! 내 퇴직금과 아파트를 털어 고용도 창출했고! 그러면 나에게도 공적자금 부스러기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냐? 정부는 왜 그 돈을 은행에만 퍼부어?” 노자가 열 받는다.
“IMF와 개인의 사업이 망한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못난 놈들이 뭔가 하다가 안 되면 항상 정부 탓을 하는 거지. IMF 때 모두가 다 망한 것은 아니잖아? IMF때 부자 된 놈도 많아. 세상은 그래, 누구는 망하고 누구는 흥하고.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거지. 그리고 그게 자본주의야.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옛말이 있지, 하나도 그른 말은 아니야. 너, 여기 그만 둘 때의 그 당당함은 어디 갔냐?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또 시작하는 거야.” 그가 날개를 마지막으로 먹고 나서 트림을 한다.
“IMF라는 괴물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빼앗기고 추풍낙엽처럼 쓸쓸한 거리를 헤매었는데? 수많은 기업이 무너졌고 대량실업으로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어. 금융회사에서만 실직한 사람이 6만 명이 넘어! 알아? 그런데 공무원은? 내가 알기로는 모두가 말짱해. 그리고 난 아무 잘못이 없어, 본사가 도산을 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바람에 줄도산을 한 거지. IMF를 일으킨 놈들은 다 쥐새끼들이야! 다 쥐구멍으로 숨어 버렸잖아. 한 놈도 보이지 않아!”
“너는 공무원 때려 친 놈이 마음은 아직도 공무원이냐? 아직도 공무원 때가 덕지덕지 붙었어. 뭐, ‘정의사회 구현’, ‘보통 사람들의 시대’, 이런 거? 꿈 깨, 너는 아직도 멀었어. 너무 순진하달까? 언제 철들래.” 그가 시계를 쳐다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노자, 나 들어가 봐야 돼. 너도 알다시피 요즘 복무기강 단속중이라. 다음에 얘기하자.” 그는 노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서둘러 나간다. 노자는 카운터에서 계산도 안하고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근처 쌈지공원, 노자는 벤치에 죽치고 앉아서 벌써 몇 시간째 생각에 잠겨있다가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쥐새끼 같은 자식! 쥐란 놈은 철학도 정직함도 없고, 언제나 어둡고 축축한 길로만 다니며, 늘 양식을 축내는 놈들이라고 생각해. 그 놈들은 자기들 때문에 도산한 업체에게 눈곱만큼의 자비심도 없고, 회개나 개과천선이 안 되는 놈들이지! 그 놈들은 밤이 되면 서울역 지하도에서 때에 절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신문지 몇 장을 이불삼아 머리까지 덮고 자는 사람들이 안 보일거야.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않지. 아! 이런 얘기하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도대체 마누라를 어떻게 한다? 이건 도를 넘는데, 나가 뒈지라는 게 말이 돼? 나도 폭력을 써? 하지만 폭력으로는 이길 수가 없을 거야.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자꾸 쪼아대는 장 닭 같은 마누라가 무서워. 마누라는 전생에 장 닭의 우두머리였을 거야. 차라리 노숙이나 할까?’
출정2
회계사 사무실, 두 사람이 ‘파닭’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다. 홍철이는 맛있게 먹는데 노자는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홀짝거린다. 늘씬한 키에 반짝이는 눈이 계속 노자를 이리저리 훓어 본다.
“야, 어쩐 일이냐? 사무실까지 찾아오고? 여기 파닭 한 번 먹어봐라. 요즘 인기 짱이다. 닭튀김과 파를 같이 먹으면 느끼함을 잡아주기 때문에 아주 맛있어. 절묘한 맛의 조화랄까? 노자야, 넌 전공이 뭐냐?”
“회계학이지.”
“회계학이라고? 야! 너는 사업하지 말고 딱 이 업종으로 왔어야 했는데, 나는 옛날 국세청에 있었잖아? 그나마 국세청 출신이라고 버텨왔는데 이제 서서히 약발이 떨어져가. 사고 쳤을 때 바로 나를 찾아오지 그랬어?”
“야, 솔직히 내가 무얼 잘못했냐? 그리고 마누라도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가 뒈지라니?”
“잘못이 많지. 진작 찾아와서 나하고 상의 했으면 세금도 거의 안내고, 부도 즉시 막말로 위장이혼 등을 통해 재산을 빼돌려서 처자식은 먹여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망할 놈의 사업을 바로 접었어야지, 직원들을 끼고 꾸물거리다 손해가 커진 거잖아? 즉시 해고시켰어야지. 망한 놈이 납품대금 다 결재해 주고. 넌,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약한 게 탈이야. 오죽하면 제수씨가 그런 말을 했겠냐?”
“아픈 데를 용케 찌르는군.”
“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지. 그러니 갈비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암 그렇고말고.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좋아해 놓고는 못난 놈이 마누라 탓이지. 너 도덕적 해이란 말 알지? 사업하다 망하고도 도덕타령 하는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런 놈들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도와줘 받자 고물이 없으니까. 야! 파닭 좀 먹어라. 그래 봬도 유명한 집에서 너를 위해 특별히 시킨 거야.”
“고맙긴 한데 속이 별로라서……. 저축은행에서 수백억씩 빼돌린 데 관여한 새끼들은 다 잡아 처넣어야해! 뉴스를 보면 죄지은 놈이 포토라인에 서서 의기양양하게 폼 잡는 꼴이라니. 마치 개선장군 같아.”
“그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 이미 빼돌릴 것은 다 빼돌려서 처자식은 살릴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지. 너는 뭔가 착각을 하는데, 처자식이 남편이나 아빠를 부끄러워 할 줄 알지?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거야. 자기들을 용감하게 지켜주었으니까. 그리고 당당히 세상을 향해 소리치지, ‘대가성은 없었다.’라고. 그러면 끝이야. 용감하게 ‘배째라’하는 거지. 아! 멋지고 장엄하기까지 해.”
“그건 그래. 하지만 이제 그러한 패러다임도 바뀔 때가 된 것 아냐? 그리고 나는 억울해. 나는 죽도록 일했어. 그런데 모두가 나를 죄인 취급해. 아, 나도 지쳤어. 이제 취직이나 해야 할 것 같아.”
“노자! 네가 말하는 패러다임은 영원히 안 바뀔 거야. 왜냐? 그것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거거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선 죽은 자도 무덤에서 파내는 세상이니까. 노자야! 나 약속이 있어서, 급히 나가봐야 돼. 지금이 우리로서는 대목이지, 회기결산 이 닥쳤거든.” 홍철이 기다란 몸을 일으킨다.
“미안해, 다음에 이야기 하자.” 홍철의 말에 노자는 마지못해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다.
‘뱀 같은 자식! 아직 부탁도 꺼내지 않았는데…….’
출정3
청사인근에서 노자와 고용노동부 다니는 신우가 통닭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야! 안주 좀 먹어라. 빈속에 속 버리겠다.” 신우의 살 오른 얼굴을 통통한 닭다리가 반쯤 가리고 있다.
“닭대가리! 쳐다보기도 싫다. 마누라처럼 막 쪼아댈 것만 같아. 거기다 닭발은 왜 시켰냐?”
“야! 닭발은 써비스야. 싫으면 다른 집으로 갈 걸…….”
“내가 찬 밥 따슨 밥 가리게 됐냐? 그냥 처먹자. 내일은 후배를 만나볼 생각 이야.”
“그 또라이 신학자? 지난 번 서울이 잠긴다고 평화의 댐 성금 낼 때, 그 자식이 차라리 교회에 헌금을 해서 그 돈으로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더라니까? 종말이 가까웠다나? 개뿔도 하나 없는 가난뱅이 신학자, 안 만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그리고 노자야! 넌 죽었다 깨나도 공무원 타입인데 왜 철밥통을 깨트렸니?”
“그럼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 하냐?”
“당근이지. 자본주의가 뭐냐? 자본 없으면 개털! 그게 자본주의 아니냐? 자본주의라는 짐승은 인정사정 보는 일이 없어, 만족을 모르지. 너, 이말 기억하니? ‘정의에 실패한 자는 용서돼도 자본에 실패한 자는 용서할 수 없다’란 말?”
“아니? 그런 말도 있어?”
“있다마다. 내일, 그 가난뱅이 친구 만나면 꼭 물어봐라.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욥은 자본을 잃고 거지가 되었지. 자본을 잃은 그 자체가 죄악이야.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이 게거품을 물고 욥의 잘못을 지적하지. 나의 좌우명이 뭔지 아냐? 나의 좌우명은 한마디로 ‘돈이 곧 정의다’라는 말이지. 너, 이 말을 부정하면 위선자야.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이 곧 하느님이다.’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러니 노자, 너도 어디 가서 돈 없는 표시 절대 내지 마. 돈 없다고 죽는 소리하면 그 순간부터 돈도 안 꿔줘.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들이 닫히는 거야.” 노자가 일어선다.
‘돼지 같은 놈! 내가 돈 꿔 달랠까봐 미리 못을 박는군.’
“왜? 갈려고? 술 한 잔 더해. 안주도 많이 남았는데…….”
“…….”
출정4
교회, 후배와 노자가 본당의 책상이 달린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눈다. 손에는 일회용 커피가 들려있다. 후배의 단정한 검은 색 정장이 낡았다. 그는 계속 미소를 지우려고 노력하지만 까칠한 노자 때문에 자꾸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후배, 하나 물어보자. 내가 내 돈으로 사업하다 내가 망해서 괴로운데. 친구? 그 씨팔 놈들은 나보고만 잘못했다고 지랄을 떨지. 하나도 안 도와주면서.”
“선배, 나는 목사가 될 거야. 그리고 여기는 본당이야. 씨팔이라는 육두문자는 삼가 해줘! 욥기 4장 7절에 이런 구절이 있지.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무슨 말인지 알아? 사업이 망한 건 선배의 죄로 인한 것이란 얘기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야. 예정조화설에 의하면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대. 그런데 천국 갈 사람은 ‘주여 저의 죄가 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고, 지옥 갈 사람은 ‘내가 무얼 잘못했는데?’라고 한 대. 선배! 빨리 회개하세요.” 노자가 갑자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내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데 뭐가 죄야? 너도 똑같은 놈이군. 에라, 개새끼! 목사가 되겠다고? 신도들이 걱정된다!”
“선배,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어! 그리고 선배도 그 성질머리 좀 고쳐. 부정부패에 흥분하던 시대는 다 지나갔어. 누구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촌스럽게 흥분하지 않아. 정의를 왈가왈부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무조건 귀를 틀어막지. 나나 되니까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교회로 와. 내가 선배의 새까만 죄를 눈같이 희게 다 씻어줄 테니까. 그리고 선배! 마침 식사시간인데 우리교회 식당에서 식사나 하고 가요. 오늘 메뉴가 마침 닭도리탕이거든.”
“너나 실컷 처먹어라.” 노자가 일어선다.
‘사탄이 따로 없군! 그러니까 너도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지? 아! 미치겠다.’
4
가을이 깊었는지 모락산 계곡을 타고 낙엽이 흩날린다. 산 아래는 가을인데 이곳은 초겨울이다. 움막집 안에 아내와 노자가 마주앉아있고, 아이들은 방안에서 밥상 위에 책을 놓고 숙제를 하고 있다.
“당신, 친구들 만난 건 어찌됐어요?”
“응, 아직……. 다시 만날 거야. 조금 있다가 다시 만나서 한 놈씩 못을 박아야지.”
“벌써 친구들 만난다고 나간 지가 며칠 짼데 그렇게 미적미적해서 되겠어요? 사업 잘될 때 당신한테 다들 신세를 졌잖아요. 돈이라도 꾸어 봐요.”
“소리 좀 낮춰, 애들 공부하잖아. 염려 마, 친구 불알을 잡고 늘어질 게!”
“이인, 애들 듣는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불알이 뭐요? 그리고 당신은 그 흔한 보험 하나 안 들었어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병들어도 다 죽어가도! 띠링, 띠링, 전화 한 통! 100세까지 보장!”
“여보! 그만 좀 해! 내 몸뚱아리가 보험인데.”
“뭐라고요?” 아내가 눈을 부릅뜨자 노자가 움찔하더니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비닐하우스 담벼락에 쓰인 빨간 스프레이 글씨가 달빛을 받아 아우성치고 있다. ‘보험? 그래, 그것이 있었지. 내일은 한 번 알아봐야지.’
이튿날 아침, 아내와 아이들이 출근하자 노자는 보험증서 몇 개를 들고 보험사에 전화를 한다. 목소리에 잔뜩 희망이 들어있다.
“저, 보험사죠? 저 노자라고 하는데요. 제가 든 보험의 해약환급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려고요.”
“노자씨라고요. 가만있자……, 지급이 정지되었는데요. 압류가 되었군요.”
“여보세요! 보험금이 지급정지 되다니요? 본인한테 통지도 않고 그럴 수가 있어요?” 노자의 목소리가 커진다.
“법원이 보낸 출석통지서를 못 받았어요? 이사를 다녔나요? 노자씨가 2회 이상 불출석해서 궐석재판에서 정해진 거예요. 보증보험사에 대출이 있으셨군요. 고객께서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미리 해약을 하셨어야죠. 우린 아무런 잘못이 없다구요.”
“그럼, 내가 잘못했다는 말인가요?”
“딱 맞추셨습니다. 권리 위에 주무셨군요. 제가 장담하건대 아마 선생님의 다른 보험과 예금도 마찬가지 신세일 겁니다.”
“내가 잤다구요? 진짜 열 받네.”
“흥분하지 마시고요. 제가 잘 설명해 드리죠. 법 원리적으로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요. 즉 자기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자는 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법적으로도 그 권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야! 불알이 빠지도록 뛰어다녔는데 자빠져 잤다고? 너, 죽을래? 그리고 보험가입 때 핸드폰번호부터 시작해서 온갖 정보를 다 받아놓고서 최소한 이런 사실은 전화로 알려주는 것이 보험사의 의무 아냐? 너도 의무 위에 자빠져 잤군, 개새끼!” 노자는 전화를 끊고 손에 쥐고 있던 보험증서들을 땅바닥에 던지며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싼다.
5
저녁,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루 종일 친구들을 찾아다니다 저녁도 못 먹고 마을버스에 내린 노자는 물넘이 둑에 앉아서 까페에 둘러싸인 백운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짙어가는 어둠과 함께 화려하게 어려 오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 산등성이를 스치고 호수를 건너오는 바람에 노자는 정신을 차린다.
‘집으로 들어가야지……. 부딪쳐야지. 모두들 내가 잘못했다잖아? 그런가 보지. 그럴 거야.’
호수를 끼고 늘어선 까페와 음식점들이 식욕을 자극한다. 능안마을 입구에 차려진 포장마차의 삼파장 알전구가 노자를 유혹한다. 만원 아래의 안주를 팔지 않으려는 포장마차 아줌마의 싸늘한 눈길을 피하고 사정해서 오천 원 안주에 잔술 두 잔을 시켜 마신다.
‘오! 주신(酒神)이여, 진정으로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황홀한 술맛이군요. 난생 처음 맛보는 이런 술맛 누구도 모를 거예요. 이제 모락산의 저승사자도 무섭지 않습니다. 될 대로 되겠지요. 될 대로 되라고 하세요. 까짓 것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노자는 산길을 오르면서 먼 옛날 권력다툼의 피비람을 피해서 이곳에 처음 터 잡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을 생각한다. 그가 낙양을 사모해서 모락산이라 이름붙인 이곳이, 지금은 까페에 모텔에 음식점이 가득 차서 모두가 먹고 자고 싸는 데에 올인을 하다니……. 노자는 세월이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과 1년 전만해도 임영대군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어 이 산길을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으니까.
큰길 옆으로 난 소로를 한 참 걸어 집에 오니 문이 꼭꼭 잠겼다. 집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문고리를 세게 잡아당긴다. 산바람소리에 추위에 절은 노자의 소리가 묻히고 몇 번을 잡아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노자는 상심하여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문 앞의 공터에 쭈그리고 앉는다. 산속의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는지 몹시 추워서 고양이새끼처럼 몸을 둥그렇게 만다. 몸마저 뻣뻣해지는 것 같다. 노자는 일어서서 몸을 활짝 펴보았으나 잘 펴지지 않고 이내 쪼그라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다가가 문을 두드린다.
“문 좀 열어줘! 나야, 나! 나는 아무 죄도 없다구.” 이제 입마저 잘 벌어지지 않는다.
“엄마! 밖에 무슨 소리가 들려요.”
“바람 소리야.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마!”
대답이 없자 노자는 아까처럼 몸을 말고 한 쪽 구석에 쭈그려 앉는다.
‘그래! 난 사람이 아니야. 사업에 쫄딱 망한 거지잖아! 그 사이 세상이 짐승들의 세상으로 바뀐 게 틀림없어. 이제부터 짐승이 되는 거야. 내가 짐승이 되지 않고는 절대 저 문을 통과할 수 없어! 왜 진작 그걸 몰랐을까?’
노자가 옷을 잔뜩 추켜올려 옷으로 머리를 감싼 채 갑자기 엎드려 담벼락 옆을 네발로 기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하여 머리를 쳐들고 혼자서 교대로 말을 주고받는다. 어슴프레한 달 빛 아래서 노자는 마치 실성한 사람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얼굴이 가려져 개처럼 보인다. 노자가 담벼락을 따라서 기어가며 중얼거린다.
“노자야! 너무 서러워 마라. 그들은 다 짐승이야! 너는 잘못이 없어. 너의 잘못이라면 짐승세상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것뿐이야. 이제 정의의 시대는 갔어.” 머리 위로 ‘철거대상 건물 12월 31일까지 철거!’라는 빨간 글씨가 보인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너는 날 이해해 주는군. 고마워. 저 빨간 글씨가 우리의 종말을 예고하는군. 먼 옛날 이상사회가 있었지. 요순시대가 그랬대. 나라가 거짓말하는 일도 없고 민간인 사찰도 없었대. 위정자들이 백성을 졸로 보지도 않았다고 해. 모두가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법 없이도 살았다고 하지…….” 노자가 담벼락 끝에서 방향을 돌려 되돌아온다.
“당근이지! 에덴동산에서 이상사회로, 이상사회에서 탐욕사회로, 그리고 탐욕사회에서 마침내 짐승사회로, 우리는 계속 타락해 온 거야. 지금은 짐승들의 전성시대야. 그런데 우리야말로 진정한 사람이었거든, 그들은 다 짐승이고!” 집 문 앞에서 다시 되돌아선다.
“마누라는 장 닭이고, 자식새끼들은 삵 괭이야. 모피아 한권이는 공짜 좋아하는 쥐새끼고, 회계법인 사무장 홍철은 차갑고 교활한 뱀이고.” 모퉁이를 다시 되돌아온다.
“옳거니! 고용노동부 신우는?”
“그 놈은 돼지야. 욕심이 똥까지 찼어. 그리고 후배 놈은 주둥이만 살아있는 사탄이야.” 문 앞에서 되돌아간다.
“맞아. 네 말이 참말이고말고.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사람 탈을 쓴 거군. 요즘 여자들은 그 탈마저 깎고 다듬어서 처음의 탈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고? 아! 너무 춥다. 들어가자. 그런데 문이 열려야 들어가지.”
“저 문이 왜 안 열리는지 알아?”
“몰라. 뭔데?”
“문은 짐승에게만 열려있기 때문이지.” 모퉁이에서 되돌아온다.
“뭐라고? 그럼 어떻게 하지?”
“저 문을 통과하려면 아주 죄 많은 짐승이 되어야만 해, 하이에나나 늑대 같은……. 저들도 처음에는 얼굴이 있었지. 그러나 모두들 짐승으로 변하면서 얼굴이 탈이 된 거야.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도 얼굴을 탈로 바꾸고 귓구멍을 틀어막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쪼아대는 짐승이 되는 거야. 그것도 아주 잔인한……. 크르릉!! 어때?” 갑자기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다.
“괜찮은데! 네 말이 맞아! 개새끼처럼 꿈도 꾸지 말고. 컹! 컹!” 문 앞에서 되돌아간다.
“그래, 그거야. 이 명박(冥薄)스런 세상에서 꿈이란 너무 사치스럽고 잔인해. 이제부터는 사료를 처먹는 거지. 개가 되면 철거도 당하지 않아. 개에게 철거란 천부당 만부당이지. 찬 밥 따슨 밥 가리지 말고. 컹! 컹!” 빨간 글씨를 올려보며 모퉁이에서 되돌아온다.
“내 탈은 어때? 괜찮아?”
“돼지를 닮았군.”
“그렇다면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정의! 이딴 소리 하지 말고! 꿀! 꿀!”
“그래! 재밌다. 난 뱀처럼 교활하게, 그지? 킬! 킬!”
“그래, 이 세상 누구도 우리 같은 가난뱅이에게 귀 기울이지 않아. 개 같은 경우지. 켕! 켕!”
“너도 이제 깨달았냐? 세상의 모든 귀는 부자에게로 이미 떠났어. 아이들마저 귀를 틀어막지. 멍! 멍!” 문 앞에서 되돌아간다.
“그 동안 우리가 부르짖었던 말들은 한 마디도 귓구멍을 통과하지 못했어. 웃기는 세상이군. 멍! 멍!”
아이들, 숙제를 하다말고 창가에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엄마! 밖에 개가 짖나 봐요.”
“응? 이제 무슨 소린가 들리네. 아빤가 보다. 네 아빠도 이제 변했나보다. 애들아 문 열어줘라.”
아이들이 문을 열자, 추워서 벌벌 떠는 시커먼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열심히 흔들면서 기어 들어온다.
“끙! 끙!”
“엄마! 개새끼!!”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놀라 동시에 소리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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