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혜석의 남자들

쥬띠 2015. 8. 2. 19:14

 

나혜석은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유달리 남자 복이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그랬다. 당시 일본에 유학을 온 유학생들 중 남자는 모두 기혼자였고 여자는 모두 처녀였으니 그들의 사랑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철석같이 결혼을 약속해도 귀국하면 본처와의 이혼이라는 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유교전통의 뿌리가 깊은 조선의 부모나 어른들은 ‘조강지처 불하당’이란 말로 이혼을 반대했고 결국은 첩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1914년, 19세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한 남자는 당시 유학생 중 최고의 인재 소리를 듣던 최승구였다. 당시 그는 오빠인 나경석의 친구이자 게이오대학 유학생이었다. 그도 나혜석을 사랑했지만 이들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1916년에 요절했다. 당시 25세. 그도 나경석의 양해아래 나혜석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집안어른들의 반대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고 한다. 나혜석의 상처는 매우 커서 한 때 발광상태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916년 나혜석은 춘원 이광수와 연인관계에 이른다. 평소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론을 주장하던 이광수는 나혜석과 죽이 맞았을 것이다. 나혜석보다 네 살 많은 춘원은 최승구와 동갑으로서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첫 번째 애인이었던 최승구를 많이 닮아서 나혜석은 오빠의 반대만 아니었으면 둘의 결혼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광수는 <어린 벗에게>라는 글에서 자기의 감정을 피력했듯이 나혜석을 열렬히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에는 오빠 나경석이 극구 반대했다. 표면적으로는 이광수가 고국에 본처가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이광수가 가난한 것이 더욱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춘원의 입장이 아니라 동생의 입장에서 나혜석의 성공을 염원하던 그는 천애의 고아나 같은 가난뱅이 춘원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해, 오빠 나경석은 서둘러 열 살 연상인 김우영을 소개해주고 이들은 1920년에 결혼에 이른다. 김우영의 재력이 나혜석의 예술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오빠의 믿음아래 결혼했을 것이다. 김우영은 자상하고 성실했으나 예술적 이해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1927년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최린을 만난다. 그는 삼일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명이고 당시 주도적 활동을 한 민족 지도자였다.

나는 공의 안내로 많은 공연과 전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리시가, 몽마 르뜨, 미술관, 박물관, 연극, 활동사진, 댄싱홀, 백화점 등 정말 꿈만 같습 니다. 이곳에서 본 많은 작품들은 시들어가는 나의 그림에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주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나면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져서 한 숨이 절로 나올 뿐이지요. 그 점에서 공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 니다.”

“과연 당신이 할 말이요.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당신은 누가 뭐래도 조선 의 천재요. 또한 보물이외다.”

나혜석보다 열여덟이나 많은 오십의 나이로 노회한 최린은 조선에서 예술적 목마름으로 신음하던 나혜석에게 파리에서 마음껏 봉사를 하면서 나혜석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이 일은 나혜석을 결국 파멸로 이끌었고 민족과 친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최린 자신도 친일이라는 급격한 변절의 길로 들어선다.

 

1927년 봄, 이상은 나혜석이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에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라는 제과점에서 화가인 구본웅과 함께 만난다.

제가 선생님의 글은 신문과 잡지를 찾아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이상은 첫눈에 나혜석에 반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요? 어떤 것을 읽었나요?”

“‘내가 어린 애를 기른 경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그리고 소설 ‘원한’을 읽었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조심조심 말하는 이상에 대해 나혜석은 감명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지요? 머리가 명석하군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나는 조선의 천재를 만난 것만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아요. 기억력과 정보력이 대단해요. 이상 김해경이라고 했지요. 아호가 참 멋스러운데…….”그녀는 잘 생긴 이상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아호를 말씀하시니 몇 년 전에 ‘신여성’에 발표하신‘김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에 쓰신 정월이란 아호를 보고 글과 아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아! 그 글도 읽었어요? 이상!”

“제발 말씀을 낮추시지요.” 이상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혜석에게 겨우 말했다.

“이상은 미남이군요. 미남이라서 여자가 많이 따르겠지만 조선의 인텔리로서 일부일처에서 벗어나서는 곤란해요.”라고 말하며 나혜석은 옆에 앉은 이상의 등을 살짝 쳤다. 잠시 합석하겠다던 그녀는 서너 시간을 앉아 열변을 토하고 이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훗날 이상은 <날개>란 소설을 썼을 때,

내가 프롤로그에서 밝혔소. ‘내 정신이 은화처럼 맑다’, ‘위트와 파라독스를 늘어놓겠다.’, ‘디테일에 속지 말라’, ‘조선의 여인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미망인이다’라고 말이요. 갑갑하니 내 속 시원이 말해 보리다. 나는 조선의 남자들이 다 죽었다고 보오. 그래서 ‘여왕봉과 미망인’이란 말을 했고요. 여왕봉이 누군지 아세요?”

“여왕봉이라? 나… 혜석! 일전에 이상이 말했었지. 충무로의 메이지 제과점 에서.” 구본웅이 말했다.

“바로 맞혔소. 조선의 여자 중의 여자, 정월 나혜석이요.”

“아! 그랬었군. 조선의 남자가 다 죽었다니? 그건 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

“내가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전제했어요. 조선의 남자는 모두 19세기에 유폐되어 있어요. 내가 ‘19세기 식’이란 수필에서 분명히 말했어요. ‘내가 이 세기에 용납되지 않는 최후의 한 꺼풀 막이 있 다면 그것은 <간음한 아내는 내어 쫓으라>는 철칙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곰팡내 나는 도덕성이다.’라고 말이요. 나는 그런 면에서 금홍을 용 서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나 자신과, 정월의 남편인 김우영을 싫어하오. 조 선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혁명가인 정월 선생님을 결과적으로 매장시켰으니 말이요.”

“그 말이 나를 찌르는군. 나도 그 수필을 읽었지.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이 없는 것처럼 가난할 뿐 아니라. 더 불쌍하다.’라고 썼더군. 나를 질타하 는 말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네. 간음한 상대방도 남자인 우리들 자신이면 서도 시침을 떼고 돌을 던지는 것은 양심적이지는 못하다고 생각해. 정월 선생님이 쓴 소설을 자네도 읽었겠지?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오더군. 기생 과 동거, 첩, 혼외정사와 성 매입을 일삼는 남성이 오히려 당당한 조선이 현실이라 고…….”

“조선의 잘난 남자들을 보시오. 모두들 창씨개명에 변절해 버렸어요. 최재 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월 선생님과 관계된 사람들을 보시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최린, 남편 김우영, 한 때 동경에서 염문을 뿌렸던 춘원 도 다 변절해 버렸소.”

 

나혜석을 쓰면서 나혜석의 남자들을 한 번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