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 희 ]
모노드라마
등장인물
이철원 : 경희의 아버지.
김부인 : 이철원의 아내로 경희의 어머니
사돈마님: 김부인과 비슷한 나이로 뚱뚱하다.
경희 : 올해 19세로 일본 유학중에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옴.
오라버니댁,
시월이 : 주인댁 하녀로 점동이의 엄마.
떡장수 : 얼굴이 얽고 명주수건을 쓴 40정도의 여자
늙은 과부 : 유복자 수남의 엄마. 김부인과 20년 된 친구사이
* 등장인물은 최소한 2명은 있어야 하겠다. 3명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경희와 1 인 다역을 하는 남자 1명(경희오빠, 아버지), 여자 1명(시월이, 떡장수)이면 좋을 듯하다.
(다만, 남녀 역할을 1인이 해도 무방해 보인다)
때
1910년대
1
무대
안채와 사랑채가 좌우로 보이고 그 가운데 마루가 있으며, 사랑채 안쪽에 재봉틀이 보인다. 사랑채에 경희가 앉아서 양복 속적삼을 가지고 재봉질을 하고 있다.
(경희 오빠 등장,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가 혼자서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경희오빠 :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는다) 어머니! 경희를 일본에 보내주 세요.(사이) 경희는 휼륭한 자질을 가진 바른 아이입니다. 저 벽에 걸린 많은 상장을 보세요.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경희는 일개의 평범 한 아낙네로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이입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하 고 있어요. 어머님도 확신을 가지세요. 경희는 우리 조선의 인재입니다. 반드시 조선의 위대한 선각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버님을 설득해 주세요. 저도 아버님께 강력하게 권할 것입니다. 경희가 하고 싶 은 일을 할 수 있게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사이)
압니다. 왜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 어린 것을 이역만리로 보내 는 일이며, 남들처럼 손자, 손녀 보며 재미있게 사시고픈 마음을 요. 그 리고 좋은 혼처도 많이 놓치신 것도 다 압니다. 또 이번에도 혼인을 재 촉하는 편지가 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머니! 흔들리지 마세요. 꼭 경희는 유학을 보내야만 합니다. 경희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이 조선 을 위해서도 꼭 학문을 익혀야만 합니다. 어머니! 도와주셔요.(엎드려 흐느낀다)
경 희 : 안녕하세요? 저는 경희입니다. 저는 이번에 여름방학을 맞아 유학 중이던 일본에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저의 작은 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강 력하게 설득해서 일본유학을 가게 됐었거든요. 오빠는 나를 여자라고 일 체의 차별을 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해준 유일한 분입니다. 지금 도 오빠를 생각하면 고마움에 눈물이 난답니다.(회상에 빠져 눈물짓는다)
(경희오빠 등장, 마루를 지나 사랑채로 들어온다)
경희오빠 : 경희야, 우리 조선은 변해야만 한다. 이제 여성도 당당히 이 변화의 대 열에 동참해야 해. 너는 누가 뭐라고 하든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학문 을 하거라. 그리하여 조선 최고의 여성이 되어다오. 조선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여성화가가 되거라. 나는 늘 너를 지켜볼 테다.(퇴장)
경 희 : 저는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일본에 다시 가기 전에 집안 정 리며 바느질, 재봉틀일, 자수 등을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잠을 줄여야 할 정 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의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한창 학문의 기 쁨에 빠져있는 나에게 공부를 집어치우고 시집을 가라고 성화입니다. 그동 안 여러 곳에 혼담이 있었지만 제가 공부가 끝날 때까지는 안가겠다고 펄 펄 뛰는 바람에 미루어 두었었는데, 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기어이 시집을 보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나이 스물도 안됐는데 저의 모든 꿈 을 접고 시집을 가라니요? 저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이럴 때 오빠라도 곁 에 있으면 큰 힘이 될 터인데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안방에서 사돈마님과 어머님이 오랜만에 만나 곰방대 에 담배를 피워 물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사돈마님이 제가 일 본에서 왔다니까 보고 싶다고 부리나케 달려오신 거였지요.
‘아가! 아가! 서문 안사돈 마님이 널 보러 오셨다.’ 엄마가 날 부르시길래 가봤지요.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실지 잔뜩 긴장이 됐었답니다. 나는 사돈 마님께 공손히 절을 했지요.
‘아이고 그 좋든 얼굴이 어쩌면 저렇게 상했나? 오죽 고생이 되었을꼬? 손 이 꼭 시집살이 한 손 같구나. 여학생들 손은 비단결 같다는데 네 손은 왜 이러냐?’하고 자애스런 음성으로 말하면서 나의 손목을 잡으셨습니다.
‘제 손으로 빨래를 하고 밥까지 해먹으니 그렇지요.’ 어머니는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돈마님이 깜짝 놀라시며
‘저런 그러면 집에서도 안하던 일을 객지에서 가서 하는구나. 너 다니는 일 본학교 규칙이 그러냐?’하고 묻더군요.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라고 대답을 했더니
‘저런, 왜 그리 고생을 하니?’라고 하시며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 적삼 위 의 등도 토닥이고, 얼굴도 쓰다듬어 주시더군요.
‘일본에는 겨울에 불도 안땐다고 하지? 그리고 반찬은 감질이 나도록 조금 준다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사니?’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십니다.
‘네, 불은 안 때지만 견딜만해요. 반찬도 꼭 먹을 만큼 주지 모자라지는 않 아요.’라고 공손히 대답하였지요.
‘그러자니 모두가 고생이지, 그런데 네 형은 그동안 병이 나서 너를 못 보 러 왔다. 아마 오늘 저녁은 오겠지.’라며 보고픈 형 얘기를 하네요.
‘네 좀 보내 주세요. 그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암, 그렇지 너 왔다는 말을 듣고 나도 보고 싶었는데, 형제끼리 그렇지 아 니하겠냐? 거기를 또 갈거니? 인제 그만 곱게 꾸미고 있다가 부자 집으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재미있게 살지 그렇게 사서 고생할 것은 무어니?’ 사돈마님이 안쓰러운 듯이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에게
‘그렇지 않소? 내 말이 옳지요?’하며 동의를 구하자 어머니가 ‘네, 그래도 하던 공부 마쳐야지요.’하고 저를 두둔해 줍디다.
‘얘! 공부는 그렇게 많이 해서 무엇 하니? 생긴 팔자를 바꾼단 말이냐? 군 사무소의 주사라도 한단 말이냐? 지금 세상에는 사내도 배워가지고 쓸데가 없어서 쩔쩔매는데……’라고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네요.(사이)
제가 그 표정을 보아하니
‘아이구 저 계집을 누가 데려갈꼬? 어서 시집을 가거라. 공부는 해서 무엇 에 쓰니?’라고 말하는 것이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아요. 참 기가 막히는 세상입니다. 나는 속으로 한마디 했습죠.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구나. 작년에도 똑같은 소리 아니었든가? 먹 고 자고 싸는 것만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요. 배우고 알아야 비로소 사람 이지요. 사돈마님 집안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도 다 배우지 못한 죄이지요. 그러 니까 여자가 시집가서 씨앗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아내 를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아시겠어요?’라고 말이죠. 하기야 소귀에 경 읽기였겠지요.
우리 형이 나에게 한 말이 뭔지 아세요?
‘얘, 우리 시어머니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마라. 더구나 시집 이야기는 일절 하지마라. 여학생들은 예사로 시집의 말들을 하더라. 아이구 망측한 세상이지. 우리 자라날 때는 어떻게 처녀가 시집 말을 할 수 있다더냐? 그 뿐 아니라 여러 여학생 험담을 어디 가서 그렇게 듣고 오시는지, 듣고만 오시면 똑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구나. 정말 내 동생이 학생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듣기 싫더라. 일본 가면 계집 다 버리느니, 차마 못 들을 말 씀을 다 하신다. 그러니 아무쪼록 말을 조심해라.’라고 합디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우리 할머니 얘기입니다.
‘얘, 옛날에는 여편네가 배우지 않아도 복 받고 오래 살고, 사내아이 많이 나서 잘만 살아왔다. 자고로 여편네는 동서남북도 몰라야 복이 많단다. 얘, 공부한 여학생들도 보리방아만 찧게 되더라. 사내가 첩 하나도 둘 줄을 모 르면 그것이 사내냐?’ 시집을 갈 때 가더라도 하도 여러 번 들으니까 이제 는 도무지 듣기 싫어 죽겠습니다. 도대체 여자가 짐승입니까?
사돈마님 말씀하시길
‘아기가 바느질을 할 줄 아나요?’하고 묻습니다.
‘네, 바느질도 곧잘 해요. 남정네의 윗옷은 못하지만 자기 옷은 꿰매어 입 지요.’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자, 사돈마님이 놀라며 소리치네요. ‘아이구 저 런, 어느 틈에 바느질을 다 배웠대요? 양복 속적삼을 다 해요? 학생도 바 느질을 다 하나요?’ 마치 ‘그 바느질 꼴이 오죽할꼬?’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요.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저를 제일 믿어준답니다.
‘어디 바느질을 편히 앉아서 배울 새나 있나요. 그래도 차차 철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싶어지나 봐요.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더군요. 어려운 공부를 하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나 봐요. (사이) 양복 속적삼은 작년 여름에 남대문 밖에서 일본 여자가 가르치는 재봉틀 바느질 강습소에 날마다 다니며 배웠지요. 자기 동생들의 양복도 해서 입히고 모자도 해서 씌우고 또 제 오라버니 양복까지 했어요. 일어를 아니까 선생하고 친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까지 다 가르쳐 주더래요. 낮에 배운 것을 밤이면 새벽 한 시까지 앉아서 배운 것을 보고 그대로 그리고 모든 치수를 적었어요. 나는 그게 무엇인가 하였더니 나중에 재봉틀 회사 감독이 와서 그러는데 ‘이제까지 일어로만 된 것이라서 가르치기에 불편하더니 따님이 만든 책으로 퍽 유익하게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비로소 가르치는 책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역시 가르치면 어디든지 쓰일 데가 있더구만요. 그뿐 아니라 그 점잖은 일본사람들에게도 어찌나 존대를 받는지 몰라요. 그 사람이 경희가 왔단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감독이 일부러 또 찾아왔어요. 일본서 졸업하면은 꼭 저희 회사의 일을 보아달라고 하더래요. 처음에는 월급이 천오백 냥은 줄 수 있대요. 차차 오르면 3년 안에 이천오백 냥은 받게 된다고 해요. 다른 여자는 제일 많은 것이 칠백오십 냥이라는데, 아마 그것은 일본까지 가서 공부한 까닭인가 봐요. 저기 유리창에 걸어 놓은 저 산수화도 경희가 재봉틀로 만든 겁니다.‘라고 어머니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태도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따가 급히 입을 오라버니 속적삼 만지던 것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나는 바깥채로 급히 나왔습니다. 더 앉아 있어봤자 속 터지는 소리만 할 게 뻔하니까요. 바깥채로 돌아왔더니 우리 집 하녀 시월이가 한 마디 하네요. ‘작은 아씨, 서문 안댁 마님이 또 시집가라는 말씀을 하시지요?’라고요.
사돈마님이 조용합디다. 충격을 받은 게지요. 서둘러 돌아가셨으니까요. 우리 형님이 시집에서 사돈마님이 혼자 안방에서 중얼거리는 걸 엿들었다는데요. 뭐라고 한 지 아세요. ‘네가 아마 큰 계집애를 버려놓고 인제 시집보낼 것이 걱정되니까 저렇게 칭찬을 하는 거지?(사이) 아냐? 감독이 왔었다고? 그리고 존대를 해? 설마, 월급이 군 사무소의 주사도 바랄 수 없는 이천 량이란 것이 사실일까? 그래도 김부인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안방마루 유리창에 걸린 산수화도 경희가 재봉틀로 만들었다지 않은가? 그때도 재봉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었지. 그래, 그렇다면 내가 여학생이란 것을 잘못 알아왔지. 정말 경희처럼 계집애도 공부를 시켜야겠다. 어서 차별을 두었던 손녀딸들을 내일부터 학교에 보내야겠다.’라고 했다지 않아요. ‘호호호!’
엊그제는 떡장수가 왔었습니다. ‘이 더운데 작은 아씨는 무얼 그렇게 하세요?’하고 떡장수가 떡 함지를 내려놓으면서 인사를 하더군요. 매일 빠지지 않고 들리는 떡장수인데 수다가 웬간하지요.
‘어느 틈에 김치 담그는 것을 다 배우셨어요. 날마다 다니면서 보았는데 작은 아씨는 도무지 노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책을 보시지 않으면 글씨를 쓰시고 바느질을 아니 하시면 저렇게 김치를 담그시고……, 작은 아씨 같은 이나 그렇지, 어느 여학생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 이가 있나요.’하고 수다를 또 막 풀어놓습니다. ‘그건 떡장수가 잘못 안 것이지 여학생은 사람이 아니요? 여학생도 옷을 입어야 살고 음식을 먹어야 살 것이 아니요? 여편네가 여편네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신통할 것이 있소. 저 칭찬 많이 받았으니 떡이나 한 스무 냥 어치 살까?’ ‘아이구 떡 팔아먹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야요. 칭찬이 아니라 정말이야요. 정말 몇 해를 두고 날마다 다니며 보아도 작은 아씨처럼 낮잠 한 번도 주무시지 않고 꼭 무엇을 하시는 아씨는 처음 보았어요.’라고 하기에 제가 ‘떡장수 오기 전에 자고, 떡장수 가고나면 자니까 자는 걸 못 보았지.’하니, ‘또 저렇게 우스운 말씀하시네. 떡장수가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아무 때나 다녀가지 학교 다니는 학생같이 시간을 맞춰서 다니나요? 그렇지 않소?’하며 시월이한테 도움을 청하네요. 시월이도 ‘그래요, 어디가 아프시기 전에는 한 번도 낮잠 주무시는 일이 없어요.’하고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여보 떡장수! 떡이 다 쉬면 어찌하려고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오. 흰 떡 닷 냥 어치하고 계피 떡 두 냥 반어치만 내놓으세요. 그리고 또 오세요.’ 떡장수가 힘없이 떡을 세어 놓고는 일어서네요. 다시는 내 앞에서 여학생 흉을 보지는 못하겠지요.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요? 호호!
떡장수가 가고나자 어머님과 20년 된 친구사이인 늙은 과부가 오셨습니다. ‘참으로 애기는 못하는 것이 없구나. 아들이라고 수남이 하나 있는 거 애지중지 키웠는데, 며느리라고 열일곱에 시집온 지 팔년이 지나도록 시어머니 저고리 하나 지을 줄을 모르고, 도대체 배우려고 하지를 않으니…… 바늘을 쥐어주면 졸고 앉았고, 밥을 하라면 죽을 쑤어오고. 아! 이집 며느리는 시어머니 저고리를 저렇게도 곱게 만들고, 또 경희가 저렇게 부지런한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저런 민첩한 며느리를 얻지 못하였는가? 하고 한숨만 나오는구나.’하시고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하고 쉬시네요. 저 여인은 또 자기의 며느리를 생각하는 거죠. 나는 저 여인을 볼 때마다 ‘내가 꿈꾸는 가정은 결코 그러한 가정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자손, 내 친구, 내 지인들이 만들 가정도 결코 이렇게 불행하게 하지는 않겠다. 오냐, 내가 꼭 하고야 만다.’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떡장수가 떠나고 시월이와 단 둘이 남았습니다. 일어서서 시월이를 따라 부엌으로 가서는 ‘얘, 나하고 하자. 부뚜막에 올라앉아서 풀막대기로 저어댈까?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을 땔까? 어떤 것을 하였으면 좋겠니?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니 너 하라는 대로 할 테다.’라고 하자 시월이는 불도 때며 풀을 젖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이구 그만 두셔요. 더운데.“라고 했다가 이내 ’아이구 이 년의 팔자. 그러면 불을 때셔요. 풀은 제가 저을 게요. 저녁 진지에는 작은 아씨가 즐기시는 옥수수 맛있는 것을 얻어다가 쪄드려야겠다.’하면서 신이 났네요. ‘그래, 그렇게 어려운 것은 오랫동안 해온 네가 해라.’ 하면서 불을 땠습니다.
풀이 ‘푸푸’하고 쑤어지는 소리, ‘부글부글’ 끓는 소리, 밀짚이 타며 ‘탁탁’ 내는 소리. 아! 동경음악학교 연주회석에서 듣던 소리 같군요. 그리고 아궁이 저 속에서 여기까지 불길이 강해졌다 약하게 번지는 모양은 피아노의 음률과 어쩜 이리 닮았을까? 열심히 젖고 앉아있는 시월이는 이런 재미를 모르겠지? 그러나 세상에는 나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나 묘한 미감을 느끼는 자가 있겠지? 어머? 시뻘건 불꽃이 저렇게 파랗게 변하다니! ‘참으로 재미가 있구나.’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지요.
시월이가 ‘대체 작은 아씨는 별 것을 다 재미있다고 하십니다. 빨래하면 땟국물이 흐르는 것도 재미있다고 하시고, 마루걸레질을 하시면서 남은 쪽마루 먼지의 뽀얀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시고, 마당을 쓸면 쓰레기 모아지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시고, 나중에는 무엇이 재미있다고 하시려는 지요? 뒷간에 구더기 끓는 것은 재미있지 않으셔요?’하며 놀립니다. ‘오냐, 그것까지 재미있게 보아야 하겠지만, 내 눈과 머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발달하지 못했으니 불쌍하고 한심스럽다.’하고 속으로 말했답니다. ‘얘, 그런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빨래는 언제 하니? 모레라고? 그러면 그날은 늦어지겠구나. 일찍 끝나더라도 과천에서 더 놀다 와라. 그러면 건넌방 아씨하고 저녁 해놓을 테니 늦게 들어와 먹어라. 그리고 내 손으로 한 밥맛이 어떤가 보아라. 호호호!’ 시월이는 무척이나 저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지난번에 일본서 올 때 시월이 아들 점동이에게 형님 아기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사주었지요. ‘얘, 그런데 너와 일할 것이 딱 하나 있다. 너 왜 그렇게 우물 뚜껑을 더럽게 해 놓니? 도무지 더러워서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내일부터 설거지가 끝난 후에는 꼭 나하고 우물 뚜껑을 청소하자. 너 혼자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겠니? 나하고 같이. 재미있게, 하하하.’라고 하자 ‘또 재미요? 하하하하.’라고 하며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도군요. 어머니는 늙은 과부보고 그럽니다. ‘부엌이 떠들썩한 걸 보니 또 웃음이 시작되었군. 아이,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저 애가 오면 밤낮 셋이 몰려다니며 웃는 소리에 도무지 산만해서 못 견디겠어요. 젊었을 때는 말똥 구르는 것이 다 우습다더니 그야말로 그런가 보아요.’ ‘웃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댁에를 오면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하고 한숨을 ‘후’하고 또 쉬는군요.
2
어제의 일입니다. 어머니가 불러서 안방에 가니까 아버지하고 밤새 나눈 얘기를 해주십니다. 저하고 혼담이 있는 집이 있는데 아버지는 밤 한시에 오셔서 첫 닭이 우는 새벽까지 있다 가셨는데 결심을 단단히 하신 것 같더래요. ‘이번 혼처는 꼭 놓치지를 말고 해야지. 그만한 곳은 없소. 그 신랑 아버지 되는 자하고 나는 전부터 익숙히 아는 사이니까 다시 알아볼 것도 없고, 그 아들도 그만하면 쓰지 별 다른 아이 어디 있겠소? 장자니까 그 많은 재산 다 상속될 터이고, 경희는 그런 대갓집 맛며느리 감이지……’ ‘글쎄 나도 그만한 혼처가 없는 줄 알지만 지가 그렇게 열길이나 뛰고 설치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렇게 싫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보냈다가 나중에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생기면, 자식이라도 그런 원망을 어떻게 듣자는 말이요……’
‘아……니, 불길한 일이 있을 까닭이 있나? 인품이 그만 하겠다. 추수를 수천 석 하겠다. 그만하면 됐지.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요? 계집애 나이 열아홉이 적소? 내가 잘못이지 계집애를 일본까지 보내다니…… 계집애가 시집가기 싫다니? 그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어? 남이 알까 무섭지. 벌써 적합한 혼처를 몇 군데를 놓쳤으니 어떻게 하잔 말이야! 아이…… 저만 대답하면 지금이라도 바로 하지. 오늘도 재촉 편지가 왔는데…… 기왕에 계집이라도 그만큼 가르쳐 놓았으니까 옛날처럼 부모끼리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벌써 사흘째 불러다 타일렀으나 도무지 말을 들어 먹어야지. 계집년이 되지못한 고집은 왜 그리도 쎈지. 신랑 삼촌은 조카며느리 삼겠다고 몇 번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남들이 부끄럽게 계집애더러 물어본다나? 그러지 않아도 다 큰 계집애를 일본까지 보내었느니 어떠니 하고 욕들을 하는데, 그래서 생각해본다고 했지.’하면서 혀를 차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기다리겠소 그려.’
‘암, 그게 벌써 올 정월부터 말이 있던 것인데, 동네 집 새악시 믿고 장가 못 간다더니……,’
‘아이, 그러면 속히 좌우간에 결정을 내야겠는데 어떻게 하나? 저는 기어이 하던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때려죽여도 시집은 안가겠다 하는데, 그리고 더구나 그런 부자 집에 가서 치맛자락 늘이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다고 해요. 그래서 제 동생 시집갈 때도 제 것으로 해놓은 고운 옷은 모두 주었습니다. ‘비단치마 속에 근심과 설움이 있느니라’라고 하는 말도 있잖 아요. 그 말도 옳긴 옳아요.‘
‘그러기에 계집애를 가르치면 건방져서 못쓴다는 말이야.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그렇지…… 글쎄 그것도 그렇지 않소. 오죽하면 집에서 혼인을 거꾸로 한단 말이요. 김판사 집에서도 우리 집 내용을 다 아니까 혼인을 하자고 하지 누가 거꾸로 혼인한 집 새악시를 데려가려고 하겠소? 아니야, 이번에는 꼭 해야지……, 계집애가 공부는 그렇게 해서 무엇해? 그만큼 알았으면 그만이지, 일본은 또 누가 보내주긴 하구? 이번에는 기어이 혼처를 정해야지. 내일 또 한 번 불러다가 말을 안들으면 또 물을 것도 없이 해버려야지…… ’라고 하며 노기가 가득하며 일어서더랍니다.
‘그런데 일본 가서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요?’라고 말하며 도로 앉더랍니다. ‘얘야! 나도 하나 남은 큰 딸을 마저 내 생전에 시집을 보내놓아야 내 죽어도 눈을 감겠는데…….’ 그래서 솔직히 말해드렸다.
‘아니요. 그전보다 더 부지런해졌어요.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루 걸레질이며 마당이며 깨끗하게 치워놓아요. 그뿐인가요. 떡할 때면 떡방아 다 찧도록 체질해 주지…… 그러게 시월이는 좋아 죽겠다지요.(사이) 내가 아들의 권유로 경희를 일본에 보냈지만 늘 염려되는 것은 경희가 만일에 일본까지 유학을 했다고 잘난 체를 하든지, 공부한 위세로 사내같이 앉아서 먹자고 하면 남부끄러워 그 꼴을 어떻게 볼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 경희는 그렇지 않았어요. 대견하게도 일본에서 돌아오면 이튼 날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갔지요. 고것이 일 년에 세 번 휴가를 오는데, 경희만 왔다 가면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다락 벽장까지 깨끗이 목욕을 하였지요. 그래서 다락이 지저분하던지 벽장이 어수선하게 되면 벌써 경희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지요. 이번에도 경희는 일본에서 오자마자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다락 벽장을 청소했어요. 그런데 이번 소제법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요. 가정학에서 배운 정돈, 위생학에서 배운 청결, 또 미술시간에 배운 색과 색의 조화, 음악시간에 배운 장단의 음률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위치를 완전히 바꿔 새로 정리했어요. 자기를 도기 옆에다 놓아보고, 칠첩반상을 칠기에도 담아보고, 주발 밑에는 주발보다 큰 사발을 받쳐도 보고요. 그리고 하루하루가 크게 발전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대견한지요. 아들 말을 듣고 일본 유학을 보내길 참 잘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단다. 그랬더니 너의 아빠도 웃으며 말하더라.
‘아들 말 듣길 잘한 것 같기는 하오. 나도 그래서 기특하게 여긴다오. 저희 할머니도 늘 그러셨지. ‘다락하고 벽장이 분을 발랐구나, 참, 깨끗하기도 하다’하고 말이요. 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오. 하지만, 내일은 세상없어도 해야지.‘하며 사랑으로 나갔단다. 서슬이 퍼런 게 아마 오늘은 너하고 결판을 낼 기색이다.
3
무대
한 쪽에 기다란 거울이 놓여있다.
날이 밝고 점심을 앞두고 아버님이 부르셨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하신 말처럼 불문곡직하고 혼처를 정하지 않으면 유학이고 뭣이고 끝이랍니다.
‘얘야, 이제 정하자. 너는 고생을 몰라서 그래. 아직 철이 안 났구나.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계집이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라고 다그칩니다. ‘안돼요. 싫어요. 그리고 아버님 말씀은 이제 옛날 말이어요. 지금은 계집이라 해도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처럼 돈도 벌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어요.’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화가 난 아버지가 뭐랬는지 압니까?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나는 아버지의 그렇게 싸늘한 표정을 처음 봤습니다. 아버지답지 않게 이렇게 저를 달래도 봅니다. ‘얘야, 그리로 시집가면 좋은 옷에 평생 배불리 먹다가 죽지 않겠냐?’라고 말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벌벌 떨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공자님의 말씀에도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먹고만 살다가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지요. 보리밥이라도 저의 노력으로 제 밥을 먹는 것이 사람인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의 개나 같지요.‘
사랑에서 나오니 안마루에서 점심상이 차려졌습니다. 시월이와 건넛방 형님은 간절히 점심 먹기를 권하나 들은 체도 아니 하고 골방으로 들어서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흐느껴 울었드랬습니다. 저는 방바닥에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벽에다 머리를 부딪치고 기둥을 끌어안고 빙빙 돌며 안절부절 했답니다.
‘아이고 어찌하나…… 이집에 있으면 밥도 축내고 옷도 사 입혀야 되니까 나를 쫒아내려나 보다. 이 넓은 천지에 몸 하나 둘 곳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지금 내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길은 쌀이 곡간에 쌓이고, 돈도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가기도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 길은 내 팔이 부서지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게 되고, 종일 땀을 흘려 남의 일을 해주어야 겨우 몇 푼이라도 벌게 됩니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요. 사랑의 맛은 꿈에도 못 볼 것이지요. 발 뿌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돌을 밟아야 한다. 그 길에는 천 길 낭떠러지도 있고 날카로운 산꼭대기도 있습니다.
‘아! 이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오늘까지 택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꼭 정해야만 한다. 오늘 택하면 내일에는 다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교사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요. 친구가 충고를 해준다고 해도 소용없다. 내가 택하고 내 정신으로 결정한 것이라야 후회가 없을 터이다.(사이)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어느 길을 택해야 당연한가! 어떻게 살아야만 좋은가? 조선의 여자란 인습에 파묻혀 있다. 여자의 생명은 삼종지도라는 것이 가정교육이다. 여자가 일어서려면 주위가 모두 압박으로 변하고, 움직이면 사방에서 욕이 돌아온다. 동무들은 한결같이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읍시다.’라고 한다.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니……‘ 저는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이 몸에 비단치마를 늘이고 이 머리에 비취 옥잠을 꽂아볼까? 대가 집 맛 며느리는 얼마나 위엄스러울까? 새아기 새색시 놀음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시부모의 사랑인들 얼마나 많을까? 지금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몸이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귀여움을 받을까? 친척인들 얼마나 부러워하고 우러러 볼까?’(사이)
아! 잘못하였습니다. 왜 아버지가 ‘정하자’ 할 때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나요? 왜, 부귀를 싫다고 했나요? 지금 당장 사랑방에 가서 아버지 앞에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고 공부도 집어 치우자. 그리고 가지 말라는 일본도 다시는 가지 않겠다. 그래, 이 길을 밟을까 보다. 그러나…… 아이구, 어찌하면 좋을까?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무서운 표정을 생각하고는 몸을 흠칫 떨었습니다. 언제나 다정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저에게 없습니다.
아버지! 과연 그렇지요. 나란 것이 무얼 하나요. 남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요? 아, 사람 노릇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같이 모든 것을 하는 여자도 평범한 여자가 아닐 것입니다. 사천년의 관습을 깨뜨리려고 나서는 여자는, 웬만한 학문과 뛰어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겠지요. 살아서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죽어서는 불란서를 구한 잔다르크 같은 백절불굴의 용맹과 희생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껏 배운 학문을 톡톡 털어서 모아도 별 볼 일이 없습니다.(사이)
남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나 참으로 좋아할 줄을 모르고, 진정으로 웃어줄 줄을 모르는 나는 백치에 불과하다. 한 마디 대답을 하려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에는 조리가 없는 둔한 혀를 가졌다. 조금만 괴로워도 싫고, 조금 맞기만 하여도 통곡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이 사람이 이러는 대로 저 사람이 저러는 대로, 동풍이 부는 대로 서풍이 부는 대로 휩쓸려 다니는 나약한 의지를 가졌다.(사이)
이것이 사람인가? 이것을 가진 위인이 사람 노릇을 하겠단 말인가? 이까짓 남들 다 아는 ‘가나다라’ 쯤의 학문으로, 그리고 남들도 다 지을 줄 아는 삼시 세끼 밥 먹을 때 오른 손에 숟가락 잡을 줄 아는 것쯤으로는 벌써 틀렸다. 어림도 없는 허영심일 것이다. 만일 사업가의 부인들이 알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사이)
따지고 보면 김 판사 댁도 참 딱하게 됐습니다. 나 같은 천치가 그런 고귀한 댁에서 데려가려고 하면 ‘네네’하며 얼른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싫다고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봐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일가친척이 나를 볼 때마다 걱정들을 하시는 것이 당연할 만도 하지요.
저기 머리에 비녀를 꽂고 쪽진 부인이 지나가네요.(사이)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을까요? 남편에 대한 사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만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군요. 자식을 사랑한다고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칠 줄은 모르는 거지요. 저렇게 사는 것도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나요? 생각할수록 힘이 빠지네요. 하지만 오늘은 저 부인이 보다 훌륭하게 보이는군요.(사이)
저기 설거지하는 시월이가 보이네요. 시월이의 머리에도 비녀가 쪽 져진 것이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나한테는 이렇게 어렵게 자식의 교육을 고민하는 데 저들은 저렇게 쉽게 살아갈까요? 어쩌면 저렇게도 쉽게 비녀들을 쪽지게 되었나요? 어쩌면 저렇게 자식들을 많이 나아가지고 오순도순 잘 사나요? 아! 저 부인들이 나보다 몇 십 배는 나아 보여요.(사이) 그 부인네들이 훌륭한가요? 내가 훌륭한가요? 이 부인네들이 사람일까요? 내가 사람일까요? 그러면 어찌하여야 훌륭한 사람이 되나요?
나는 부지중에 경희는 모든 창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거울에 나 의 몸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래, 저 거울에 비친 나는 금수가 아니다. 분명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고귀한 사람이다. 아!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을 아주 잘했다. 그렇다 괴로움이 지나면 즐거움이 있고, 눈물이 다하면 웃음이 오는 것이 금수와는 다른 사람의 이치다. 사람이 금수와는 다른 것은 생각을 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버린 밥찌꺼기를 좋다고 먹는 금수와는 달리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얻는다. 이것이 사람과 금수와의 차이이고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다.(사이)
나는 여자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또한 조선사회의 여자이기에 앞서 우주 안에 사는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부인의 딸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딸이다. (사이)
오냐,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 정상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 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경희, 두 팔을 번쩍 들고 껑충껑충 뛴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치며 벼락이 번쩍인다. 황홀감에 빠진다. 그대로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의 딸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저의 눈과 귀는 이렇게 활동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무한한 영광과 힘을 내려주십시오.
저의 있는 힘을 다하여 일 하겠습니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시옵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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