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코로나'19>와 종교-2

쥬띠 2021. 2. 1. 20:17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의 신년 슬로건이다. 목사님은 우리를 향해 회개하라고 설교한다. 나는 감히 목사들이 먼저 회개하여야 하지 않을까?’란 의문을 품어본다. 우리를 향해 던지는 회개하라는 목사님의 말이 왠지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다.

 

중세시대에도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닌데도 그 넓은 지역이 왜 초토화됐을까?

종교가 지배하던 시절이라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기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지도자들도 페스트는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고 말하고 집회를 주재하고 집회에서 병든 자들에게 기도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페스트는 사람들의 호흡기에서 나오는 비말을 타고 유럽사회 전체를 신속하게 삼켰다. 호흡기 전염병에는 흩어짐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모임을 택한 것이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모임을 전제로 부흥해왔다가 <코로나‘19>로 인해 흩어짐(diaspora)’이란 정반대의 상황 앞에서 목사들이 당황하고 저항하고 질질 끌려가는 형세다. 왜 그런가? 바로 대면예배 축소는 헌금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많은 이유는 모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도시를 벗어나 산 속에서 사는 자연인이란 TV프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나도 자연인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루소나 노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라무위자연을 선호한다. 예전에는 무위(無爲)를 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위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는 말조차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무위를 한다(‘無爲)는 것을 어렵게 한다. 현대인들은 잠시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소위 무위를 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현대인들이 거의 없다.

기독교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심리에 가장 적합한 종교다.

교리를 떠나 초기에는 단순하던 전도방식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음악 등을 도입하여 처음에는 오르간, 피아노 위주에서 드럼, 전자기타 등을 사용하고, 그리고 외연을 넓혀 무용, 연극공연, 유명 연예인과 아이돌 초청하기도 한다. 미술분야는 캘리그래피, 미술치유 프로그램 등으로 무위가 불가능한 현대인들을 유혹한다.

묵상과 개인기도는 줄어들고, ‘주여!를 세 번 소리치고 시작하는 통성기도가 많아진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세상을 살다가 더 정신없이 믿음생활을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의 개인적 만남보다는 교회의 집회를 통한 집단적 만남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그럼으로써 대형교회나 사이비 교회로 가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이비 교회들은 모임보다도 더 강한 집단 숙식을 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코로나‘19>의 범람에 교회가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신음하고 있다. 그 흔하던 산소가 부족하여 환자들을 산소를 구하려고 산소통 앞에서 긴 줄을 서고, 산소통에 산소를 충전하기 위해 기다리다 죽는 사람들의 모습이 외신에 보도된다. 숨 쉴 산소가 없다는 끔직한 현실은 <코로나‘19>가 만든 현대판 디스토피아.

! 주여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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