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비이성적 행위
무대 : 청와대 집무실, 비서실장 등장.
(대통령은 곰곰이 생각에 빠져 비서실장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다. 약 간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비서실장이 천천히 들어와 대통령의 안색 을 살피며 말한다.)
실 장 : 각하! 부르셨습니까? (슬그머니 다가온다.)
대통령: 음……. (흥분을 가라앉히며) 부장은 왜 아직 오지 않는 거야?
실 장 : 연락을 취했으니 곧 올 겁니다.
대통령: 실장! 자네는 부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말해보게. 나 는 부장이 K공작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을 보고 그가 능력도 있고 조금은 우직하지만 교활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장차 더러 운 정보를 가지고 나에게 흥정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단 말 일세. 유공도 찬성했고……, 그래서 발탁한 거지.
실 장: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부장을 경계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정보기관이란 독특한 음 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아마 그들의 음지문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사이)
각하께서 지난 과거에 그들 때문에 당한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 실겁니다. 그래서 부장과 독대하시는 것을 가급적 피하시고 그들의 조직을 개혁하고자 하시는 것은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랬듯이 한 번 생 긴 조직은 잘라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 그들만의 기능을 할 겁니다. 개 버릇 어디 못준다고 그들은 예산통제가 불 가능한 예비비와 수많은 자금을 정부 부처의 각 기관에 은밀히 숨겨 놓고 오늘도 온갖 공작을 계속하고 있죠. 부장을 경계하십시오. 그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요.
대통령: 자네 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 과거에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입 맛에 맞는 정권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 왔지……. 그래서 나 는 지난 정권들과는 달리 민간인 사찰과 인터넷 댓글도 금지시킨 걸세. 하 지만 자네 말은 지나친 노파심인 것 같군. 정부 예산이야 빤한 것 아닌가?
실 장 : 그렇지만 꼭 그렇다고만 볼 수만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총리실에는 총리도 모르는 돈과 비선조직도 있지요. 죄송합니다. 각하! 그리고 마음을 조금 편히 가지십시오. 요즈음 안색이 어두우신 것이 눈에 띄어 마음이 걸립니 다.
대통령: 음……, 요즈음은 왠지 살맛이 안나, TV나 신문을 봐도 맨 날 어두운 소식 이고, 마누라도 영 반겨주지 않으니……. 마치 사면초가의 항우 꼴일세, 스트레스가 쌓여서 미치겠단 말이야. 그래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 울까 생각 중이라네.
실 장: 각하! 그러면 요즘 시중에 인기 있는 ‘X그라’를 복용해 보시죠. 연세 도 있으시고……, 주치의 말로는 남자는 부부관계가 없으면 전립선암 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답니다.
대통령: X그라? 나도 그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자네는 지금 나의 아픈 데를 찌르는군. 하지만 말이야 내가 혈압이 약간 높잖나? 그 약에 대해 신뢰도 가지 않고, 그리고 내가 그 약을 복용한다는 소문이라도 나 보게,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 빌어먹을 언론들이 자꾸 까칠해지는 데, 젠장!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실 장 : 그러면 살아있는 X그라를 복용해 보시죠? (은밀히 속삭인다.)
대통령: (귀를 쫑긋하며 속삭인다.) 살아있어? (입맛을 다신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순간, 대통령과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진 다.)
대통령: 음, 부장이 왔나 보군, 자네는 그만 나가 보게.
부장 등장하고 비서실장 퇴장.
(해삼 같은 얼굴의 부장이 황급히 들어온다. 비서실장이 나가면서 부장을 힐끗 째려본다. 뚱뚱한 몸의 부장은 얼굴의 땀을 닦으며 헐 떡거린다.)
대통령: 오, 부장! 어서 오게, 알아 봤나?
부 장: 예, 각하! 우선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부장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한다.)
대통령: 앉다마다, 내가 요즘 성미가 급해졌나 봐, 편히 앉게. (부장이 자리 에 앉는다.) 그리고 차근차근히 말해 주게. 무척 초조하구만.
부 장: 각하! 각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을 모두 한꺼번에 조사하기는 힘들고 우선 국방관련 고위 각료급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현재 보고된 바로는 참모총장이 어제 저녁에 모처에서 ‘룬다 리’란 여자를 만났답니다.
대통령: 뭣이라고? 참모총장이 ‘준다 리’를 만났어? 빌어먹을 수조원이 들어가는 무기구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이놈이!
부 장 : 각하! 흥분하지 마십시오. ‘준다 리’가 아니고 ‘룬다 리’입니다. 연루된 사람 은 참모총장뿐이 아닙니다. 고위 관료 여러 명이 편지를 보내고…….
대통령: 됐어! 여러 놈 필요 없어 일벌백계로 우선 참모총장을 손 좀 봐주어야겠어. 참모총장, 이 자식! 평소 맘에 안 들었어. 군부개혁에 언제나 딴지를 걸지. 빳빳한 자식 같으니라구.
부 장 : 각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성적으로 처리해야 됩니다.
대통령: 뭐! 이성적으로? 그렇다면 내가 시방 비이성적이란 말인가? 다시 내 앞에서 이성이란 얘기를 꺼내면 당신도 나와 끝이요. 알겠소?
부 장: 예, 각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은 군부 내에서 신뢰도 높고 추종자도 많으니 좀 더 신중을 기하심이…….
대통령: 그래? 이이제이라……, 그 수밖에 없어, 맞아, 그런 기발한 묘수를 모르 다니.
부 장 : 각하! 묘수라니요? 묘수 세 번이면 그 바둑 진다고 했는데…….
대통령: 부장!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언성을 높인다.)
부 장 : 각하, 죄송합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대통령: 부장, 나팔수를 동원하게.
부 장 : 아니? 각하! 지난 번 제가 나팔수를 권했을 때, 다시는 나팔수를 부 르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저는 각하를 모신이래, 각하의 뜻에 따라 가 급적 출입기자들에게 관례적으로 주던 촌지와 절기마다 보내던 선 물은 물론 간담회도 줄이고 보도자료 배포회수도 줄여왔습니다. 대기자, 원 로기자, 출입기자, 옛날에 꿀 먹은 벙어리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야말 로 신문의 1면은 저희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전설처럼 들리는 얘기로는 메이저 신문은 우리의 기관지라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공공연히 돌았으 니까요. 보도자료 하나를 뿌리면 앞 다투어 열을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저 는 각하의 뜻에 따라 이제 기자실도 폐쇄시키고 꿀단지를 봉한 지도 오래 됐습니다. 그래서 요즘 언론들이 독이 잔뜩 올랐습니다. 헌법소원은 물론 민사소송이다, 언론중재위원회 제소다, 감당하기조차 버겁습니다.
대통령: 그때는 그랬지, 사실 나는 나팔수가 싫어. 웬 나팔수가 그리도 많아. 그리고 요구사항도 많고……. 나팔이나 불 것이지 자리 욕심은 어쩜 그리도 많은지. 한 건하면 개나 소나 장관 자리를 달라니 넋 나간 놈 들……, 그게 ‘K공작’이었던가? 자네가 발탁된 때가?
부 장 : 각하! 듣기가 민망스럽습니다.
대통령: 자넬 두고 한 말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언론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네. 내가 신문사에 반론과 정정보도 신청을 한 것만도 수십 건이 야.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왜 했겠나? 내가 군부의 무기구매제도를 개혁해 서 복지예산을 조금 늘리려고 하니까 좌파정권이네, 퍼주기 포플리즘이네 하고 연일 1면을 도배하더군. 전투기, 탱크, 잠수함 어느 것 하나 리베이트 문제가 불거지지 않은 무기가 없어. 그리고 전 현직 고위관료들이 국가안 보에 관련된 기밀을 무기제조사에 넘기는 간첩행위에 모두 연루되어 있어. 그런데도 그 놈의 꿀단지가 뭔지? 조석으로 변하는 메이저 언론사의 후 안무치에는 이제 신물이 나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부 장: 앞으로 4년이면 갈 길이 먼데 이제 언론과의 소모적 전쟁을 피하십시오. 각 하! 꿀단지를 열면 그들의 복지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겁니다. 지난번까지 는 A대학부터 시작해서 R대학까지 했으니, 이번에는 S대학부터 하겠습니 다. 사실 순번을 정해서 하니까 불만도 상당히 줄어들어 관리가 편합니다. 그리고 관제 데모도 동시에 실시하겠습니다.
대통령: 역시 빠르군, 알아서 하게. 부장이 순번을 정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 야. 지난 번 L교수 문제도 순전히 나팔 불지 못한 게 원인이었어. 지난 정권 때 그 쥐 같은 새끼가 뭐라고 한 줄 아나?
부 장 : ……. (머리를 긁적인다.)
대통령: 전 정권이 역대 정권 중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래! 완벽? 완~ 벽? 이 쥐새끼를……. 그런데 자기가 무슨 민주투사라도 된 모양으로 까불다니…….(화를 삭인다.) 그리고 참모총장에 대해서는 좀 더 뒷조 사를 해보게. 군부개혁에는 개 거품을 물더니 미모의 로비스트를 따라다 녀? (방백) ‘준다 리’라고?
부 장: 알았습니다. 각하, 지금 L교수는 집에서 손주를 보고 있답니다. 그때 각하께서 참기를 잘하셨습니다. 잘못했으면 민주투사 한 명 탄생할 뻔 했습니다. 다행히 S대학에는 나팔수들이 많으니 염려 마십시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부장 퇴장)
(부장이 나가자 문이 닫히고 깊은 적막이 몰려온다. 대통령은 팔짱 을 끼고 부장을 생각한다.)
대통령: (독백) 저 친구는 참 빠르단 말이야. 나는 부장의 빠른 일처리가 언 제나 마음에 들어, 실장은 그에 비하면 굼벵인데……. 그래서 마음 속 으로는 멀리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부장에게 자꾸 의지하게 되지……. 하지만 주위에 믿을 놈이 없어……. 살아있는 X그라? 그게 무 얼까? 한 번 복용하고 싶군……. 유공도 X그라를 복용하나? 자꾸 뻗 쳐? 회춘한다고?(점점 소리가 커진다.) 에이! (짜증을 낸다.)
암 전
제4장: 사제지간
안가.
사 내: 어서 오십시요. 부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유공이 차에서 내 린다.) (사내 퇴장.)
(유공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정원의 잘 조성된 나무들이 향 긋함을 풍긴다. 유공은 꽃에 다가가 향기를 맡아본다.)
부장 등장.
부 장: (돌계단 사이로 내려와 유공에게 다가가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선 생님, 그간 적조했습니다. 기체후 일향만강하신지요?
유 공: 일향만강이라? 번거롭기는 여전하구만, 난 잘 있소만 부장께선 어 떤지요.
부 장: 염려 덕에 잘 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둘이 나란히 돌계단을 오른다.)
(둘은 현관 거실을 지나고 복도를 올라 2층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 가 자리를 잡는다. 창밖으로 시야가 확 트여 서울의 온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유공이 자리를 잡자 부장이 맞은편에 조용히 앉는 다. 그 옛날의 사제지간의 예를 부장은 나름대로 깍듯이 챙기고 있 다.)
부 장: 선생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만 안색이 매우 어두우시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화를 다 하시고요.
유 공: 그래 나도 무척이나 반갑네. 자네야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지만 내 앞에서는 제발 옛정을 생각해서 내 얘기를 들어주면 고 맙겠네.
부 장: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떤 말씀이든지 마음 놓고 하십시오. 힘닿는 껏 돕겠습니다. 지금도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각별한 애정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 공: 그래, 자네는 무척이나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지. 이제는 내가 어려 운 지경에 빠졌다네…….
(유공은 잠시 회상에 빠져든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아가씨 등장.
(아리따운 아가씨가 차를 가져다 놓고 나간다.) (아가씨 퇴장.)
(유공은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본다. 오후의 늦은 해가 북악의 능 선 위에 폭포처럼 빛을 쏟아놓는다.)
부 장: 선생님,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돕겠습니다. (옛 생각에 젖 은 부장의 목소리가 떨리며 젖어간다. 해삼 같은 얼굴과 커다란 덩 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눈가에 이슬이 어린다.)
유 공: 부장, 자네를 보니 심히 대견하구만, 숱한 제자를 보았지만 자네는 무척 특이한 향기를 지녔어.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래서 자넬 좋아했지.
부 장: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어요. 지난번 ‘K공작’ 때 는 선생님께서 각하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셔서 제가 앞이 캄캄했 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하셨습니다. 각하께서도 그런 선생님을 좋아하십니다.
유 공: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때의 자네의 얼굴이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네. 마치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해삼 같았지. (유공이 웃으며 부장을 바라본다. 부장의 얼굴이 해삼처럼 꿈틀거린다.) 미안하이, 다 지난 일이고……. 자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나도 놀라워. 그때 별명 이 ‘슬로우 모션’이었지? (유공은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거둔다.)
부 장: 선생님,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빨리 빨리’란 시대의 조류에 편승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유 공 : 부장! 그래, 그렇게 빨리 빨리 살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나?
부 장 : 아닙니다.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죠. 항상 쫓기면서 삽니다.
유 공: 부장, 나는 요즈음의 ‘빨리 빨리’에 염증이 나네. 지난번에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신중론을 펴던 H교수가, 얼마 전에는 TV의 영재 교육 광고에 나오더군. 교육은 빠를수록 좋다나? 사실은 이런 얘기 를 하러 온 건 아니고 오늘은 특별히 상의를 할 게 있어서 왔지.
(유공은 목소리를 낮추어 부장에게 얘기를 했고 부장은 엉거주춤하 게 테이블에 엎드려서 얘기를 들었으며, 때론 고개를 끄덕이고 때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북한산 등성이로 가로등 불빛이 빛나기 시작한다. 하늘에 별이 뜨기 시작하자, 유공이 일어 서서 부장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헤어져 돌아오는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다.)
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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