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미국놈 자지 봤어” 빼빼마른 기태가 큰 소리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린 나는 아메리카 타운에 있는 미군클럽의 미군들을 떠올렸다. 클럽골목에서 양갈보가 길거리에서 미군의 거시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못봤어. 너는 봤냐? 어떻게 생겼는데....” 내가 풀이 죽어 말하자 기태가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뜸을 들인다.
“ 정말 봤니?” 다른 친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그러엄! 어떻게 생겼냐 하면......” 여기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휘하고 둘러봤다.
“어떻게 생겼는데?” 다른 아이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자세히 봤는데 엄청 길어서 허리에 감고 다녀."
"정말? 에이 순 거짓부렁..."
"정말 봤다니까. 니들은 보지도 못해놓구서리."
"......" 우리들은 기가 찼으나 그의 부릅 뜬 눈을 보고서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렸을 때 기태의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소변을 볼 때 거시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비롯해서 그야말로 해박한 학자의 모습이 되어 점잖케 걸어다녔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 세계는 나에게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였다. 사실은 냄새나는 항문이었지만....
일전에 도올의 도덕경 강의를 TV로 들었다. 강의는 인기절정이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이해가 어렵다는데 아픔이 있었다.
도덕경의 첫부분인 "道可道 非常道"란 구절을 설명하는데 '도를 도라 말할 수 있지만 도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란 얘기로 기억한다. 그는 또 도란 가물(玄)하며 여자의 거시기같다고도 한 것 같다.(망각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처럼 나도 정확한 기억은 없다. -여기서 나는 도올을 험잡자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므로-)
나는 '노자가 도를 이야기 할 때 그런 용어를 처음 쓰니까 편의상 명칭을 도라고 했지만 꼭 도라고 명칭하지 않아도 된다.' 뭐 그런 뜻이 아닐까?라고 이해하고 있다.
해설이 더 어려운 것은 넌센스이며, 학문이 아니라 항문이라고 본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우화가 떠오른다. 법의 문은 만인에게 열려 있지만 문지기의 눈치를 보며 법의 문 앞에서 평생을 기다린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학문의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감히 안으로 들어가 본질, 진실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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