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황석영의 <문창과> 비판을 보고

쥬띠 2015. 9. 12. 11:31

 

   작가 황석영이 지난 9월10일 교보빌딩 강연에서 ‘오늘날 문학이 이 꼴이 된 것은 문창과 때문이다’란 말을 했다. 문창과에 다니고 있는 나로서는 갑자기 구정물을 뒤집어 쓴 꼴이다. 이어서 그는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한 작가가 워낙 많아 문학상 본선에 올라오는 작품이 모두 무난하고, 문장과 구성이 좋지만 작품들이 다 똑같다. 이 때문에 신춘문예 심사를 하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나도 작가의 그 말에 동감한다. 이는 문창과의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문창과의 방향제시를 한 말이라고 보인다. 가끔 ‘신춘’과 각종 공모에서 뽑힌 작품들을 읽으면서 절망감을 느낀 적이 많다. 천편일률적으로 소재사냥꾼이거나 생선초밥처럼 잘 다듬어진 미문이지만 어딘 지 모르게 ‘기시감’이 있고 ‘그래서?’란 질문은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문창과에서 문학의 정신이 아니라 문학의 기술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빠진 작품에 문장만을 중시하는 듯한 강의를 문창과에서 지양해야할 것이다. 작가는 이어 말한다. ‘최근 한국소설이 작품 전체 서사의 탄탄함 보다 ‘문장’에 더 관심이 있다’고 비판한다.

   최근 나는 소설동아리 활동을 접었다. 1년 반 동안 열심히 작품을 내고 학우들의 합평을 받고 합평을 하고……, 하지만 이번 학기에 소설동아리 활동을 접었다. 언젠가 학우중의 한 명이 나의 글을 ‘읽기가 불편하다’라고 말해서 ‘작가란 모름지기 독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여야 한다.’고 독선을 펴본 일도 있다. 그간 단편 공모에도 응모를 했지만 인적사항에 나이를 표시하라는 찜찜한 요구도 의심스럽고- 잡지사에 돈 벌어줄 가능성이 많은 젊은 작가 선호-, 올해 초 한국일보(?)의 심사평에 사회성 짙은 소설은 심사에서 제외했다는 어이없는 심사위원의 글을 읽기도 하면서 심적인 아픔도 겪었다.

   올 봄에 ‘김종광’ 교수님께서 단편을 가지고 젊은이들과 경쟁하지 말고 장편을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소설작법을 배우고 미문을 쓰려다 보면 나의 독창적이고 사회성 짙은 문체가 다칠 우려가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요즈음은 장편을 쓰고 있다.

   나는 결심한다. 비록 등단은 못하더라도 나만의 글쓰기를 하자. 경험과 철학과 사회성 짙은……. 언젠가 워싱턴 포스트(?)에 이런 글이 실린 것을 보았다. 분단의 나라 한국에서 통일을 주제로 번역되어 소개된 소설이 이제까지 한 권에 불과하다라는 글이다. 수많은 영화와 문학이 독일인의 유태인 학살을 다뤘다.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그렸다. 분단의 나라 한국에서 종남이와 종미년만 다루는 소설이 진정 좋은 소설인가? 세계문학의 지성들이 비웃을 것이다. 무지개는 일곱 빛깔이어서 아름답지 않던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찾고 나서는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와서 다르다는 듯이 엉뚱한 주체들이 칼을 쥐고 광복의 주체들을 암살로 죽이고, 월북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온갖 이유로 해금되지 못했다가 이제야 하나 둘 풀리고 있다.

   윤이상이라는 음악가가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이제 와서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윤이상 음악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윤이상의 음악을 전공하거나 제대로 전곡을 연주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문창과가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소설이 범람하고 ‘그래서?’란 본질적인 문제를 피하는 교육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을 찾아가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박경리 선생이 늘 ‘사마천’을 생각했다고 말했듯이, 나는 가끔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생각한다. 그들은 문학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살고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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